같은 시간 같은 나라를 여행하더라도, 여행의 추억은 달라진다. 휴양지에서 아무 생각 없이 푹 쉬거나, 소문난 맛집도 찾아가 보고 싶은 게 사람 욕심이지만, 뭔가 배우고 느끼고 싶다면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 예술을 응축한 박물관 여행보다 좋은 게 없다. 특히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은 크고 작은 박물관들이 빼곡이 자리잡고 있어 테마여행에 적합한 여행지 중 하나다.

거의 모든 박물관과 미술관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 ‘스톡홀름 카드’를 갖고 있었지만, 3일권만 끊었기 때문에 시간 여유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사진 몇 장만 달랑 찍고 잽싸게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패키지 여행식 관람을 지양하다 보니, 하루에 세 군데 이상 들르기는 어려웠다. 결국 점심은 차에서 샌드위치로 해결해 시간을 아끼며 잰걸음으로 다녔다. 최대한 동선을 짧게 하기 위해 애썼는데, 스톡홀름 시 동쪽에 위치한 유르고덴 섬에는 인상깊은 박물관들이 몰려 있어 편리했다. 이곳에는 현존하는 17세기 선박을 볼 수 있는 바사 박물관(Vasa museet), 세계 최초의 야외박물관인 스칸센(Skansen), 북유럽박물관(Nordiska museet) 등이 인접해 있다. 

박물관 따라 떠나는 유르고덴 섬에서의 시간여행

가장 먼저 소개하는 바사 박물관(Vasamuseet)은 사람들이 박물관에 대해 갖는 통념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마치 유령선 영화 속에 등장할법한 거대한 배 한 척이 통째로 건물 안에 들어앉아 관람객을 압도한다. 1628년, 물 위에 처음 뜨자마자 가라앉아 버린 군함 ‘바사 호’ 자체가 기념비적 유물로 남아있다. 배가 가라앉은 이유도, 숙적인 폴란드 제압을 위해 보다 많은 포를 싣도록 설계를 변경한 탓이라니, 인간의 탐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증거물인 셈이다.

현존하는 유일한 17세기 선박 바사 호


7층 건물 높이에 해당하는 바사 박물관은 배 주변을 둥글게 감싼 동선을 따라 배열된 9개의 전시실에 17세기 스웨덴 선원들의 생활상이나, 배의 복원과정, 발굴 유물, 당시의 인접 국가들과의 해전 상황 등을 소개해 놓았다. 330여 년이 지났음에도 원형의 95% 이상을 복원해낸 정성과 기술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특히 뱃머리와 선미 부분을 장식한 조각상은 왕가의 문장을 비롯해 천사, 영웅, 바다동물 등 다채로운 모양으로 정교하게 조각돼 당시 스웨덴 왕조의 위상을 보여준다.

바사 호를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목제 부조들(위), 제작 당시의 색채를 복원한 모습(아래)


바사 박물관을 나서면, 근처의 북유럽박물관(Nordiskamuseet)에도 들러보자. 이곳에는 박물관은 16세기부터 현재까지의 스웨덴의 일상사에 대한 유물들을 모아놓았다. 1907년 완공돼 거의 1백여 년 가까이 된 박물관 건물은 마치 북유럽 르네상스 풍 성곽을 연상시킨다. 박물관 내부를 가로지르는 홀의 길이가 125미터, 높이가 24미터라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특히 박물관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치는 구스타브 바사의 거대한 조각상은, 스웨덴의 유명한 조각가 칼 밀레스가 1925년 완성한 대작으로 장엄하기 그지없다.

성채를 연상시키는 북유럽박물관의 웅장한 모습


북유럽박물관을 지키는 구스타브 바사의 거대한 조각상

생활사, 복식사, 가구디자인사 등 다양한 방면에서 조명한 시대별 변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데,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되돌아간 듯한 실감나는 연출이 인상깊다. 특히 다리가 아픈 관람객들을 위해 층마다 가벼운 접이식 의자를 수십 개 비치해놓아, 들고 다니며 편한 자리에서 천천히 앉아 감상할 수 있게 한 배려는 웬만한 스웨덴 박물관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삐삐와 무민트롤을 만나는 아기자기한 동화나라 -유니바켄

한편 박물관은 아니지만, 바사박물관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자리한 동화나라 유니바켄(Junibacken)은 평소 그림책을 좋아했거나 잠깐이나마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고픈 사람이라면 꼭 들러보길 권한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동상이 지켜보고 있는 이곳에서는 말괄량이 삐삐의 집, 무민트롤 등 스웨덴 특유의 동화 캐릭터를 만날 수 있다.

처음에는 아담한 규모에 비해 입장료가 비싼 편이라 생각했지만, 유니바켄의 히든카드인 ‘이야기 기차’를 타자마자 그런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레일을 따라 평범하게 이동하던 이야기 기차가 어느 순간 공중으로 휙 날아오르면서, 그야말로 동화책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 듯한 환상적인 경험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삐삐의 이층집과 무민트롤의 마을을 재구성해 놓은 아기자기한 풍경에, 보는 사람 모두 동심으로 돌아가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동화나라 유니바켄 전경

유니바켄 내부에 있는 삐삐의 다락방. 침대 발치에 잠든 삐삐의 발이 보인다.

삐삐의 집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주황색 삐삐 가발을 쓴 귀여운 꼬마들이 노는 모습이 보인다. 


민속촌, 동물원, 수족관이 함께 있는 스칸센

박물관을 찾아 과거로 떠나는 여행의 피날레를 장식할 만한 곳은 단연 스칸센이다. 1891년 개관한 스칸센(Skansen)은 한국으로 친다면 용인민속촌 쯤 될까? 민속촌에서 한복 입고 대장간에서 망치질하는 아저씨나 절구질하는 아주머니들을 만날 수 있듯, 스칸센에도 예스런 전통 복식을 갖춘 스웨덴 사람들이 걸어다닌다. 잡화상 카운터에서 돈을 계산하는(척 하고 있는) 아가씨나, 책을 만들고 있는 장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비록 연출임을 알고 있더라도 신기하기만 하다.


 

스칸센의 스웨덴 전통가옥과 상점들

스칸센에서는 옛 스웨덴 마을 풍경을 연출한 건축물들을 구경하는 즐거움과 더불어, 야외동물원도 꼭 찾아볼 만하다. 엘크 사슴, 여우, 삵 같은 동물들이 시멘트 바닥에 흙이나 약간 깔아놓은 정도의 삭막한 동물원이 아니라, 그 동물이 살아온 자연환경과 최대한 유사한 조건을 만들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심지어 사람들과 함께 걸어다니는 공작 한 쌍도 보았다. 스칸센 수족관도 있지만 조금 빈약한 편이다. 스칸센은 골고루 둘러보는 데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다 폐장 시간도 긴 까닭에, 유르고덴 섬을 나서기 전 마지막 일정으로 잡으면 편리하다.

나머지 이틀 동안은 가고 싶었던 주제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찾아다니며 시내를 돌았다. 이 중에서 스톡홀름 대학교 인근에 자리잡고 있는 국립자연사박물관(Naturhistoriska riksmuseet)은 과거의 동물학박물관이 1841년 확장, 개편된 곳으로, 평소 꼭 한번쯤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이곳엔 스웨덴의 유일한 아이맥스 영화관이자 최대의 별자리 투영기인 코스모노바(Cosmonova)가 있는데 세계 최대의 영화 포맷인 옴니맥스가 상영된다.


북유럽의 자연을 그대로 담은 국립자연사박물관

흔히 자연사박물관의 박제들은 딱딱하고 생기 없는 자세로 서 있기 일쑤지만, 이곳의 표본들은 마치 살아 뛰노는 듯 자유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스웨덴의 상징과도 같은 동물 엘크 사슴이나, 날아가는 새를 잡는 삵의 동세가 너무나 자연스럽다. 표본실과 별도로, 인체의 각 장기를 크게 확대해 아이들이 놀면서 배울 수 있게 한 인체관도 인상깊다. 인체관의 입구는 거대한 사람 얼굴의 입을 통해 들어가게 되어 있고, 심장 모형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어 심장박동을 느껴볼 수도 있다.

자연사박물관 내의 역동적인 동물 박제들

 

입구를 사람의 입으로 재미있게 표현한 자연사박물관 인체관 
 
이밖에도 시내로 나오면 규모가 그리 크진 않지만 특색 있는 소형 박물관들을 만날 수 있다. 1991년 개관한 춤의 집(Dansens Hus)은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지만 알찬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곳이다. 페르낭 레제의 무대미술 ‘천지창조’가 무대 위에 생생하게 펼쳐진 모습, 중국의 손인형 같은 상설전시품이라던가, 원색적인 색채와 화려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러시아 발레 복식 특별전 등이 특히 인상깊다.
 

구스타브 3세 앤틱 뮤지엄에 소장된 고대 조각상

또한 기억에 남는 곳으로 지중해박물관(Medelhavsmuseet)을 들 수 있다. 지중해권 및 고대 오리엔트 유물을 수집하는 고고학문화사 박물관으로, 미라와 관을 비롯해 죽은 자에게 씌우는 가면, 그리스 도자기 등을 볼 수 있는데, 방 전체를 황금으로 치장한 황금의 방도 마련돼 있어 이채롭다. 이 방은 정해진 시간 이외에는 입장할 수 없을 만큼 철저히 통제된다.

국가가 관여하는 대형 박물관과 특색 있는 주제의 사설 박물관이 서로 다른 영역에 존재하면서 특화된 성격을 살려 공존하는 곳이 바로 스웨덴의 박물관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돌아보느라 숙소에 돌아와 바로 곯아떨어져 버릴 만큼 피곤했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던 박물관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