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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고양이 스밀라

15만 원짜리 비닐

by 야옹서가 2008. 2. 24.

수십 만 대가 팔린 '대박 상품'이라는 음식물쓰레기 건조기를 샀다. 축축하고 퀴퀴한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는 게 유쾌한 일도 아니고, 말려서 버리면 간편하고 좋을 것 같았다.
물건은 주문한 지 이틀만에 도착했다. 온라인 숍 고객 후기에는 배송이 늦다는 불평이 가득했는데 의외였다. 기대하면서 페트병에 모아 둔 음식물쓰레기를 붓고 건조기를 작동시키는데, 동생이 어이없는 얼굴로 나를 부른다. 1회 건조할 때마다 19시간을 연속 가동해야 한단다. 처음 듣는 얘기다.

사이트에 접속해 광고 페이지를 읽어보니 과연 '19시간 사용 시 한 달 전기료 2천 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말은 '한 달 동안 배출된 음식물쓰레기의 총량을 건조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한 달 내내 모두 더해서) 19시간' 정도이고, 전기료의 총합도 2천 원'이라는 말로 오독하기 쉽다. 하지만 그건 결국 1회 말리는 데 19시간이나 든다는 이야기였다. 말이 19시간이지, 1시간 뺀 20시간이니 이틀이나 다름없다. 음식물쓰레기는 매일 나오는데, 건조기는 쉬지 않고 돌려도 이틀에 한번 꼴로 쓸 수 있다니. 게다가 19시간이 지나도 귤껍질처럼 얇은 것이나 꼬들꼬들해질 뿐, 두툼하고 물기 많은 것들은 여전히 촉촉하다. '이거 물기나 좀 가셨구나' 싶을만큼 말리려니 24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그래도 귤껍질은 빨리 마르네."
"귤껍질은 그냥 밖에 둬도 하루면 마르는데?"
"그렇네…."

동생과 만담 같은 대화를 나누다가, 이 물건을 한달 내내 돌렸을 때 들 전기료를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몇 달만 돌리면  전기료가 물건값을 초과할 것 같았다. 누진세도 붙을 테고. 건조기가 작동 시간 내내 덜덜거리며 용을 쓰는 동안, 음식물쓰레기는 여전히 밀려 있다. 인내심을 기르는 데는 좋을 것 같다만, 이래서야 원.
카메라나 게임기 같은 거면 신동품으로 팔기나 하겠는데, 이건 음식물쓰레기 건조기라서 팔기도 힘들 것 같고…. 잘 씻어 말려서 뭔가 다른 용도로 써야 되나? 나물이나 버섯 같은 거나 가끔 말릴까? 별 생각을 다 해봤다. 하지만 아무래도 구석에서 먼지만 쌓인 채 뒹굴 공산이 크다.

흔히 음식물쓰레기 건조기가 환경친화적인 제품이라고 광고를 한다. 물론 쓰레기를 갈아서 물에 흘려보내는 음식물쓰레기 분쇄기보다는 조금 더 환경친화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물건을 작동시키는 데 드는 에너지를 생각하고, 기계를 만드는 데 드는 돈과 인력과 원자재를 생각하면 그런 것만도 아니다. 늘 그래왔듯이 손으로 내다버리면 되는데... 조금 편해보자고, 우리집도 '문명의 혜택'을 받아보자고 잔머리를 굴렸다가 톡톡히 값을 치른 듯싶다. 편리해지기 위해 발명한 물건들이 가사노동을 덜어주는 것 같지만, 그건 결국 해야 할 일을 다른 형태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속도 모르는 스밀라는 건조기가 들어있던 투명 비닐을 킁킁 냄새 맡더니 물고 핥으며 노느라 정신이 없다. 비닐을 치울까 하다가 그냥 뒀다. 본체가 무용지물이니 포장지라도 쓸모가 있어야지. 그런데 스밀라야, 그게 15만 원짜리 비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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