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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영화감독 민병훈

by 야옹서가 2008. 7. 13.

[문화와나 | 2008년 봄호] 영화감독에겐 예술영화라는 타이틀이 찬사인 동시에 낙인이다. 예술영화라면 손사래부터 치는 투자자, 개봉에 난색을 표하는 극장주, 보나마나 어렵고 지루할 거라며 관심도 갖지 않는 관객들을 떠안고 걷는 길은 멀고 험하다. 그러나 민병훈 감독은 현실을 달콤한 판타지로 포장해 팔아치우는 사기꾼보다, 우직한 싸움꾼이 되길 원한다. 영화의 절대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그의 고집은, 영화 <벌이 날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집요하고 무모한 삽질과 닮았다. 자신을 극한 상황까지 내몰 때조차, 삽 대신 카메라를 든 민병훈 감독의 ‘삽질’은 결코 무겁지 않다. “깃털처럼 가볍게, 머슴처럼 저돌적으로, 하지만 심각하진 않게.” 그가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픈 삶의 태도는 그러하다.


민병훈 감독이 러시아 국립영화대학 졸업 작품으로 만든 첫 장편 <벌이 날다>(1998)는 그의 영화관뿐 아니라 세계관을 뚜렷하게 드러낸 작품이기에 주목할 만하다. 타지키스탄 고원 마을에서 현지 배우를 기용해 현지어로 찍은 영화는 다소 낯설지만, 그 속에서 감독의 메시지는 생생하다. 모든 과정을 흑백으로 찍고 다시 세피아 톤의 색을 입힌 화면은 마치 시계태엽을 거꾸로 감아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이 같은 효과가 우화 같은 이야기와 어우러져, 영화 속으로 더욱 몰입하게 된다. 


두려움과 구원은 종이 한 장 차이

<벌이 날다>의 주인공 아노르는 초등학교 교사이자 작가지만, 내기로 한 책은 언제 출간될지 알 수 없고 살림은 늘 쪼들린다. 게다가 옆집 부자는 아노르의 집 담 아래 재래식 화장실을 만들어 수시로 드나들며 아노르의 아내를 훔쳐본다. 아노르는 부자에게 항의해 보지만 묵살된다. 억울한 처지를 하소연하면 도와줄 거라 믿었던 검사마저 “사유재산법도 모르느냐”며 부자 편을 든다. 결국 아노르는 가난한 자의 소소한 행복권마저 지켜주지 못하는 법과 전쟁을 선포한다. 즉 검사의 옆집을 사서 앞마당에 공동화장실용 구덩이를 파면서, 부자 이웃이 자신에게 했던 짓을 검사에게 고스란히 되갚는 것이다. 


아노르가 집요하게 파내려가는 구덩이가 깊어질수록 상황은 점점 파국을 향해 치닫지만, 삽질을 멈출 수는 없다. 무기력한 지식인이었던 아노르는, 삽질이라는 육체적 고행을 통해 일그러진 현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검사가 아노르의 아들에게 도둑 누명을 씌워 협상 카드로 제시할 때조차 단호히 타협을 거부한다.


아들의 자유를 포기한 대신 상처뿐인 싸움을 선택한 아노르는 절망과 고통의 깊이만큼 구덩이를 파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했던 기적과 직면한다. 그가 판 구덩이에서, 200년 동안 우물 하나 없던 마을에 처음으로 우물물이 솟아나온 것이다. 무덤이 생명의 공간으로 반전되는 순간이다. 민병훈 감독은 삶의 가장 밑바닥까지 걸어 내려가야만 기적과 같은 순간을 대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럿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구덩이와 무덤과 우물이 암시하는 상징은 명료하다.


주인공이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깨달음을 얻는 설정은 <괜찮아, 울지마>에도 등장한다. 허풍쟁이 청년 무하마트는 도박 빚을 지고 고향으로 도망가지만, 그곳에서도 천성을 버리지 못하고 성공한 음악가 행세를 한다. 거짓된 삶으로 일관하다 고향 사람들에게조차 외면당하는 무하마트는, 돌산을 깨어 집을 짓는 할아버지를 구슬려 돈을 타내고 고향을 뜨려다가 놀라운 비밀을 깨닫는다.

좀 더 원만한 상황을 선택할 수 있을 상황에서도, 민병훈 영화의 주인공들은 유독 극단을 향해 내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극단을 향한다는 것, 끝을 본다는 건 두려운 일이다. 민병훈 감독은 어떻게 두려움을 보여주면서도 구원을 말하는 것일까? 그에게 두려움과 구원은 어떤 의미일까?


“<벌이 날다>에서 아노르의 아들이 이런 ‘그만 파도 되지 않느냐’고 얘기하죠. 하지만 아노르는 ‘끝까지 더 팔 거다’라고 하면서 집요하게 더 파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나요. 나 자신을 불사를 정도로 극한까지 몰고 가야 결국 두려움의 실체와 직면할 수 있어요. 그때 바로 구원이 찾아온다고 봐요. 사실 두려움과 구원은 종이 한 장 차이거든요. 그러니 제 영화는 ‘두려움에 대한 3부작’인 동시에, ‘구원에 관한 3부작’이기도 하죠.”

두려움 3부작의 완결판격인 <포도나무를 베어라>에서는 두려움을 넘어선 구원의 메시지가 한층 더 명료해진다. 신학도인 수현은 옛 애인이었던 수아와 견습 수녀 헬레나 사이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용서하고, 또 용서받는다.


모조품 아닌 ‘진짜’를 찍고 싶은 열망

극한 상황에 몰리는 건 영화 속 주인공뿐만이 아니다. 척박한 영화판에서 예술영화를 만드는 감독도 날마다 현실과 싸우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민병훈 감독은 제작비를 줄이기 위한 편법을 쓰지 않는다. 머릿속에 그렸던 풍경을 온전히 재현하기 위해 타지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로케이션을 감행한다.
예컨대 <괜찮아, 울지마>도 한국의 적당히 비슷한 시골 동네에서 한국 배우와 함께 찍었다면 제작비를 훨씬 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 감독은 영화의 완성도를 결정하는 절대 기준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란 말은 그에게 통하지 않는다. 영화에 등장하는 길과 구덩이와 거대한 돌산조차 우직하게 만들어낸다. 세트 촬영은 거부하지만 자연을 있는 그대로 찍는 건 ‘날로 먹는 것’이라 믿기에, 감독의 시선을 담아 풍경을 새롭게 창조한다. 그의 영화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중간 지점”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세트 촬영, 정말 싫어해요. 그렇게 찍으면 몸은 편하겠죠. 하지만 그건 내 편의만을 위한 거예요. 모조품은 제가 더 잘 알아요. 하지만 진짜를 찍고 싶어요. 그래서 원하는 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다 보니 ‘감독님, 안돼요’란 말을 지겹게 들었어요.

<포도나무를 베어라>에 나오는 수도원도 2년 동안 쫓아다니면서 허락을 구해 찍은 거예요. 처음엔 다들 거절하죠. 다른 데도 많은데 왜 꼭 여기여야 되냐고 물어요. 그건 제가 어떤 여자와 결혼하려는데, 그 여자가 ‘나랑 비슷한 사람 많잖아. 왜 나랑 해야 해?’ 하고 묻는 것과 비슷해요. 당신이니까, 바로 그 장소니까 하는 거예요.”


7년간의 러시아 유학 기간 동안 그는 동양에서 온 낯선 이방인이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충무로 바닥에서 밑바닥부터 올라온 감독이 아니기에 열외자 취급을 받았다. 자본주의의 논리로 도배된 멀티플렉스 극장가에서도 그가 만든 예술영화는 소외되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천연덕스런 얼굴로 “영원한 이방인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 짧은 말 속에 지난한 그간의 삶이 축약되어 있다.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줄곧 이방인이었으므로. 하지만 힘겨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겁지 않다. 감독이라며 무게 잡다가 조로하기보다, 차라리 머슴처럼 느물느물 하고 싶은 말을 툭툭 던지면서, 관객들이 생각할 여지를 남길 수 있는 ‘열린 구조’의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보편성을 띤 무국적 영화를 향한 꿈

민병훈 감독이 지향하는 것은 국가의 색을 넘어선 ‘무국적 영화’다. 오리엔털리즘에 기대기보다 경계를 초월한 보편성을 띤 영화를 만드는 것이 그의 꿈이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란 말은 임권택 할아버지 때나 통할 얘기에요. 사실 그게 껍데기만 보는 거거든요. 그 껍데기를 빼내야 온전한 실체가 남는다고 생각해요. 전 태극기를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제일 이상해요. 이제 제발 국가는 그만 좀 사랑하고, 개인을 사랑하자고 말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렇게 애써 만든 영화도 사람들과 공유하지 못한다면 허사가 되고 만다. 그는 예술영화의 제작 지원보다 중요한 건 접근성을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설파한다. 애꿎은 예산 들여 예술영화전문관을 지어서 오히려 예술영화를 고립시키지 말고, 시내 멀티플렉스 영화관마다 한 관만이라도 다양성을 담보한 영화를 지속적으로 걸어준다면 바랄 게 없다.


“지금 준비하는 작품은 향기에 관한 영화에요. 이제 구원을 뛰어넘어 사람의 향기가 묻어나는, 신의 향기로 소통되는 영화죠.”


‘향기에 관한 3부작’을 준비 중이라는 민병훈 감독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어쨌든’이라는 단표현을 자주 썼다. DVD에 딸린 코멘터리에서도 그랬던 기억이 나기에 감독에게 물었다. 혹시 자신의 입버릇을 인식하는지, 그게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는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긍정적인 인간이거든요. 고생을 많이 했는데도, 딱 보면 고생한 사람 같지 않대요. 편해 보인다고들 하니까요. 아마 그 말을 무의식중에 쓴다면 ‘괜찮지 않아요?’ 정도의 뜻이 아닐까요?”

내가 보기에 그의 ‘어쨌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뜻인 것 같다. 고집스럽고 우직하게 예술영화를 만들어가는 그의 태도처럼. 두렵지만 끝까지 가보려는 진심이 느껴지기에, 그의 영화를 한 번 더 애틋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된다.


민병훈 | 영화감독. 1969년 출생. 러시아 국립영화대학에서 촬영 전공으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았다. 잠셰드 우스마노프 감독과 공동연출한 첫 장편 데뷔작 <벌이 날다>(1998)을 비롯해 <괜찮아, 울지마>(2001), <포도나무를 베어라>(2006)로 이어지는 '두려움 3부작'을 완성했다. <벌이 날다>로 이탈리아 토리노 국제영화제 대상-비평가상-관객상, 그리스 테살로니키 국제영화제 은상(1998) 등을, <괜찮아 울지마>로 체코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 특별언급상-비평가상 등을 수상했다. 최근작인 <포도나무를 베어라>로 부산국제영화제 PPP코닥상(2004)을 받았다. 현재 한서대학교 영상예술학과 교수로 있다.

* 삼성문화재단 <문화와 나> 2008년 봄호 '사람과 사람'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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