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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고양이 스밀라

귀가 의식

by 야옹서가 2008. 7. 27.
회사에 다시 나가게 되자, 퇴근 때마다 스밀라가 현관 앞까지 마중 나오는 빈도가 높아졌다.
열쇠를 쩔걱거리며 꺼내 끼울 때, 문 너머로 우엥 소리가 들리면 이미 스밀라가 현관까지 나온 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문을 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0여 초 정도,
하지만 스밀라는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땡' 소리를 내는 순간을 신호 삼아 뛰어나오기 때문에,
나는 스밀라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문을 열면 발아래 동그란 눈을 뜨고 우엥 울며 나를 올려다보는 모습은 귀엽지만, 한편으론 "또냐?"  싶다.
현관까지 맨발로 나왔으니, 스밀라를 붙들고 털버선발 네 개를 일일이 닦아줘야 하기 때문이다.


별 수 없이 동생을 불러 일단 스밀라를 붙잡게 하고, 수건에 물을 적셔와 발을 닦아 준다.
'퇴근하자마자 스밀라 발 닦기'가 '귀가 의식'이 된지 오래다. 스밀라는 붙잡혀있는 게 싫어서 바둥거리다,
체념하고 발을 맡긴다. "그러게 왜 자꾸 나오냐, 가만히 있으면 이런 일도 안 당할 건데."
스밀라가 '현관문에 나오는 행동'과, '붙잡혀서 발을 닦이는 일'의 인과관계를 깨닫길 바라면서 푸념해본다.
요즘은 아예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동생에게 전화를 건다. 지금 가니까, 스밀라 나오기 전에 문을 열라고.

엘리베이터 소리가 날 때마다 뛰쳐나왔으면, 내게 발견되기 전에도 수차례 현관을 맨발로 드나들었을 텐데.  
고양이는 혼자서도 잘 논다지만, 그래도 사람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몇 달을 뒹굴거리며 놀아주던 인간이
갑자기 새벽에 나가 밤에 들어오니, 마음이 헛헛해진 걸까.
내가 집에 있을 때도, 방문을 닫고 일만 하고 있으면 새된 목소리로 '아오옹 아오옹' 하며 나를 부른다.
스밀라가 소리 높여 우는 일은 거의 없으므로, 이건 명확한 '호출 신호'다.

얼마 전 어머니가 가져오신 시청각 자료 중에 동물 울음소리를 들려주는 시디가 있었는데,
그 중에 고양이 울음소리 한 대목을 반복해서 들려주는 부분이 있었다.
스밀라는 그 소리를 듣더니 시디플레이어 앞으로 다가가 빙글빙글 돌며 배회했다.
시디플레이어 안에 있는 고양이를 찾아내려고 했던 거다.
그 행동이 경계일지, 반가움의 표시일지 모르겠다. 그럴 때면 스밀라에게도 '동족'이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이를테면, 먼 외계의 별에 불시착한 인간이 현지 외계인과 친구가 되어 그럭저럭 살아가지만,
마음속으로는 '지구인을 만나고 싶어' 생각하는 것처럼, 스밀라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은 거다.

언젠가 스밀라에게도 인간이 아닌 동족 중에 가족을 만들어 주어야겠다.
고양이 입양은 단순히 친구를 만들어주는 것과는 달라서, 조심스럽긴 하다.
성격이 맞지 않는 사람과 한 공간에서 사는 게 고역인 것처럼, 서로 성격 궁합이 맞는 고양이와,
그렇지 않은 고양이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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