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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제품 | 전시 | 공연

페르소나(Persona): 정양희 인형교실 판도라 그룹전

by 야옹서가 2005. 11. 29.


<페르소나Persona: 정양희 인형교실 PANDORA 그룹전>

기간:
2005_1105 ▶ 2005_1113
장소: 다빈치 갤러리(서울 마포구 서교동 375-23 카사플로라 빌딩 지하1층)
문의:
02_6409_1701

 
  고경원_지천사(智天使)_석분 점토, 16mm 유리 안구, 모조 날개_높이 52cm 


구기윤_가시나무_석분 점토, 아크릴 안구, 아크릴 채색_높이 60cm



박수미_무제_석분 점토, 인조 안구, 유화 채색_높이 90cm


송지윤_하얀 성_석분 점토, 12mm 유리 안구, 인조 모발, 아크릴 채색_높이 55cm
 

이재연_숲의 정령, 네이핀_석분 점토, 유화 채색_높이 30cm



신화, 과학, 예술을 가로지르는 인형의 역사
무생물에 불과한 돌과 흙, 나무를 재료 삼아 생명을 지닌 인간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은 그 역사가 깊다. 키프로스의 왕 피그말리온이 만든 상아 조각상 갈라테아가, 아프로디테 여신의 힘을 빌어 진짜 처녀로 변했다는 그리스 신화는 이런 욕망의 기원을 설명할 때 종종 인용된다. 또한 유대 전설에 등장하는 진흙 인형 '골렘(golem)' 역시 처음에는 흙덩어리에 지나지 않았으나, 랍비가 인형의 이마에 진리를 뜻하는 히브리어 '에메스(aemaeth)'를 써넣음으로써 생명을 얻었다고 알려진다. 이처럼 인간을 닮은 인형이 전지전능한 힘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는 신화 속의 설정은, 인형으로 표상되는 완벽한 인간에 매료되면서,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던 인간의 양가감정을 담은 것이기도 하다.

한동안 신화나 전설, 연금술의 일화 속에서만 전해 내려온 '살아있는 인형'의 존재는, 그러나 날로 진보하는 과학에 발맞춰 점차 현실 세계에 몸을 드러냈다. 18세기 유럽에서 전성기를 누렸던 자동 기계 인형, 오토마타(automata)는 그 대표적인 예다. 1738년 프랑스의 발명가 자크 드 보캉송이 플루트를 연주하는 오토마타를 선보였을 때, 사람들은 '깜찍할뿐더러 영원히 늙지 않는 작은 인간'에게 홀딱 빠져버렸다. 당대 유행한 오토마타에 영감을 받아 창조된 예술 작품도 많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메리 셸리의 소설『프랑켄슈타인』(1818)을 꼽을 수 있다.

 한편 1890년 발명왕 에디슨이 개발한 '말하는 인형'은 단순동작을 반복하는 오토마타에서 한 걸음 나아가, 축음기에 내장된 인간의 목소리로 말하는 대량생산 인형이란 점에서 화제가 됐다. 인간과 닮은 외모 뿐 아니라 두 발로 걷고 생각하며 교감하는 인형에 대한 꿈은, 인간형 로봇의 개발로 이어졌다. 인상깊은 사례로 인간의 표정을 모방하는 MIT인공지능연구소의 '키스멧'을 비롯해, 2000년 혼다 사가 개발한 세계 최초의 2족 보행 로봇 '아시모' 등을 들 수 있다. 이렇듯 신화와 전설, 과학을 가로지르며 등장하는 인형은 단순히 장난감으로 치부하기 힘든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초현실적인 힘이 부각되는 신화와 전설 속 인형이나, 생명 창조라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과학 속 로봇과 별개로,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예술계에서도 '몸의 담론'과 연계해 인형을 바라보는 주목할 만한 시선이 등장한다.
 
한스 벨머와 구체관절인형의 재조명
현대미술에 편입된 인형을 이야기할 때 중요한 전환점으로 등장한 작가가 독일의 초현실주의 작가 한스 벨머(Hans Bellmer)다. 유럽 비스크 인형의 전통에서 유래한 구체관절인형을 작품 소재로 도입한 벨머는 1930년대 초부터 직접 만든 인형을 재배치한 연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구체관절인형은 비틀리고 결박된 신체로 인해 그로테스크한 인상을 준다. 육감적인 성징만을 적나라하게 내보이는 신체, 무방비 상태로 해체된 몸, 과장되게 드러난 구형 관절은 마치 인간이 아닌 기계 부품처럼 보인다. 벨머의 인형에서 드러나는 기형적이고 파편화된 신체는 동시대의 초현실주의자들이 대개 그랬듯 남성의 관음적 욕망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인형에서 주목할 점은 성적 욕망을 넘어 인형의 신체 이면에 응축된 정한을 포착한 '발견자'의 시각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죽어 있으나 동시에 영원히 사는 존재, 인간과 가장 닮았지만 인간일 수 없는 존재, 영원히 성장이 정지된 '어른 아이'…. 인형예술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있어 벨머의 작품을 눈여겨봐야 하는 까닭은, 이처럼 '다면적 상징을 내포한 오브제'로서의 인형을 재발견했다는 데 있다. 작가의 집요한 관음적 시선에 공감할 수 있는지 여부는 일단 뒤로 미루더라도, 벨머에 이르러 인형은 단순히 인간을 모방하는 존재 이상이 되는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한스 벨머를 필두로 구체관절인형에 담긴 상징성에 주목한 작가들이 늘어나면서, 구체관절인형만을 제작하며 주된 표현 수단으로 삼는 작가들이 속속 등장했다. 특히 이와 같은 움직임은 예로부터 인형예술이 발달한 일본에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한스 벨머의 전통을 탁월하게 계승한 인형 작가로 흔히 요츠야 시몬(Yotsuya Simon, 四谷 シモン)을 꼽는데, 그의 작품은 기계 인간을 닮은 1980년대의 Mechanical Boy 연작부터, 내장을 드러낸 해부실 모형을 연상시키는 근작에 이르기까지 작품의 스펙트럼이 넓다. 이밖에도 일본에는 인형 예술의 천국이라 할 만큼 수많은 구체관절인형 작가와 그들이 운영하는 인형 교실이 존재한다.

한국 창작 구체관절인형계의 주목할 만한 움직임
한국에서 창작 구체관절인형을 배울 수 있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지만,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몇몇 주목할만한 작가군이 등장해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한국 구체관절인형 1세대 작가로 손꼽히는 정양희의 인형교실 역시 이 중 하나다. 인형작가 정양희는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일본 '피그말리온 인형교실(DOLL SPACE PYGMALION)'에서 구체관절인형 작가 요시다 료에게 사사하고 귀국해, 2003년 1월 첫 개인전을 열었다. 당시 통인화랑에서 열린 '판도라의 상자(Pandora's Box)'전은 국내 창작 구체관절인형 전시로는 유례가 없던 것이었다. 미술평론가 박영택 역시『서울아트가이드』2003년 2월호에 기고한 전시 리뷰에서, 주목할 만한 전시로 정양희의 첫 개인전을 언급한 바 있다. 제1회 개인전 때 발간된 국내 최초의 창작 구체관절인형 화보집『Pandora's Box』는 한때 절판되었으나, 2005년 2월 열린 제2회 개인전 '에로티카(Erotica)'를 계기로 다빈치기프트에서 복간되었다.

이번에 개최되는 PANDORA 그룹전은 정양희 작가에게 사사한 37명의 인형 작가들이 참여하는 교실전 형식을 취하고 있다. 크게 체스를 주제로 한 공동 작품 전시와, 개인 작품 전시로 나뉘는 이번 그룹전에서 주목할 것은, 공동 작품 '체스'의 도입이다. 특정 주제 없이 학연·지연 등을 매개로 열리는 단체전은 친목 행사 수준을 넘기 어렵다. 그러나 공통된 주제 속에 서로 다른 개성을 집약한 '체스'는 통상적인 단체전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흥미로운 공동 프로젝트다. 체스의 말로 분장한 구체관절인형들이 흑백의 말판 위에서 삶의 비의를 우회적으로 전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특히 폰은 체스의 말 중에서 가장 작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말판의 마지막까지 전진하면 퀸으로 변신하는, 지극히 드라마틱한 역할을 맡는다. 1700년대 체스의 대가 앙드레 필리도어(Andre Philidor)는 이를 가리켜 '폰은 체스의 영혼이다'라고까지 말한 바 있다. ● 이번 전시에서는 체스를 주제로 한 공동작품 외에, 저마다 다른 페르소나를 지닌 작가들의 내면세계에 살아 숨쉬는 원형적 형상을 구체화한 개인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키덜트(kidult) 문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어온 대량생산형 구체관절인형과 달리, 조형예술로서의 구체관절인형의 세계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 고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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