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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童貞) 없는 세상을 향한 동정(同情)

by 야옹서가 2001. 6. 24.
June 24. 2001 | 제6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한 박현욱(34)의 장편소설 《동정 없는 세상》은 여자친구와 ‘한번 하는’ 것에 모든 관심이 쏠린 열아홉 살 소년의 성 체험을 다룬 성장소설이다. 미숙한 주인공이 여러 사건들을 통과의례로 경험하면서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과정이 성장소설의 특징이라면, 《동정 없는 세상》의 통과의례는 ‘동정 떼기’다.

“한번 하자” “싫어”
《동정 없는 세상》의 화자 준호는 막 수능시험에서 해방된 고등학교 3학년생이다. 공부는 딱 질색이고, 졸업 뒤의 일에도 도무지 관심이 없는 그의 소원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여자친구와 한번 자보는 것이다. 포르노 비디오와 섹스사이트를 성교육 교재로 삼아 성장한 세대, ‘지난 몇 년간의 내 개인사는 섹스를 하고 싶다는 욕망과의 투쟁으로 점철되어 왔다’고 고백하는 고등학생을 화자로 삼은 만큼, 동정을 떼고싶어 안달하는 십대 청소년의 모습이 “한번 하자”고 툭 던지는 말속에 가볍고 유쾌하게 그려진다.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대학 진학’과 ‘섹스’이외에는 성인이 되는 상징적 통과의례가 존재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대학에 진학할 확률도 희박하고 그럴 의사도 없는 화자에게 ‘동정을 뗀다’는 의미는 어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 지나야 할 관문 같은 것이다.

작가는 《동정 없는 세상》에서 불안정한 청소년의 성 체험을 묘사하면서 어른 됨의 의미를 깨닫는 과정을 세 번에 나눠 보여준다. 실패로 끝난 첫 번째 시도, 일방적인 관계에 머물렀던 첫 섹스, 서로에 대한 배려 속에서 진행된 두 번째 섹스를 순차적으로 보여준 것은“‘어른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그저 미궁을 헤메는 것도 아니고 아우토반을 질주하듯 제 원하는 바만을 채우는 것도 아니며 자기 외의 다른 사람들을 애정을 가지고 이해하려 할 때에야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주인공의 성 체험은 의식에 비약을 가져오는 일종의 통과의례라는 것이다.

욕망과 환상이 뒤얽힌 독특한 성장소설
문학평론가 황종연씨는 심사평에서 "성장소설에서 전통적으로 부르주아적 개인주의가 차지하는 자리를 ‘동정 떼기’라는 십대-대중의 담론이 점유하고 있지만, 《동정 없는 세상》의 경박함은 어디까지나 진지하게 계산된 장난"이라고 평가하면서 "섹스에 대한 욕망과 환상에 빠진 십대 소년의 이야기를 인간 성장의 보다 넓은 맥락에서 다양하게 읽힐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문학평론가 도정일씨 역시 "이 소설은 성장한다는 것이 오히려 성인의 세계를 떠나는 일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독특한 성장소설"이라며 신인작가의 소설에 힘을 실어줬다.

《동정 없는 세상》은 동음이의어의 언어유희로 ‘동정(童貞)을 떼는 건 동정(同情) 없는 비정한 어른들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형식적인 관문일 뿐’이란 메시지를 가볍고도 경쾌하게 전달한다. 하지만 작가 스스로 밝히는 소설의 미덕이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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