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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주재료)+모험과 판타지(양념) = 재미있는 철학소설?

by 야옹서가 2001. 7. 30.

Jul. 30. 2001 | 모험과 판타지 소설의 얼개를 빌려 철학, 종교, 사회학, 유전자 과학 등 다양한 지식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낸 이른바 ‘지식소설’이 눈길을 끈다. 김용규의 《알도와 떠도는 사원》(이론과실천) 은 지식욕과 탐구심이 강한 소년 알도의 모험을 통해 서구 근대화 과정에서 이성과 과학이 어떻게 신의 자리를 대신했으며, 그 긍정적 기능과 부정적 영향은 무엇인지 짚어나간다.

15세 독일 소년 알도는 인도에서 인공두뇌학자로 일하는 아버지 에크슈타인 박사가 인간 유전자 조작 프로젝트를 거부하다 사교집단 ‘태양의 사원’에 납치된 사실을 알고 아버지를 구하기 위한 모험에 나선다. 인도 소년 고오빈다, 인공두뇌를 가진 소녀 레나와 함께 마녀 나긴스가 지배하는 어둠의 지역 ‘제8구’로 빨려 들어간 알도는 올곧은 지혜와 인간의 선함에 대한 믿음으로 악의 무리와 싸워 나간다.

신비주의 또는 과학을 맹신하며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자들을 비판하는 작가의 주제의식은 유전자 조작 프로젝트의 이름으로 ‘이카루스’를 따온 것에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단순히 서양 철학사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폭넓은 사상적 측면을 다룰 뿐 아니라 이성과 과학을 맹종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을 함께 담은 《알도와 떠도는 사원》은 “기존에 출간된 철학소설을 넘어선 ‘지식소설’”이라는 저자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16세기 과학 혁명에서부터 현대 게놈프로젝트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전달하면서도 현실세계와 판타지의 세계가 교차하는 소설적 재미를 함께 담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모험소설의 형식을 빌려 풀어나가는 철학적 지식
소설의 형식을 빌어 난해한 사상과 지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책은 《알도와 떠도는 사원》이 처음은 아니다. 1994년 12월 출간된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장영은 옮김, 현암사)는 이른바 ‘철학소설’의 개념을 대중적으로 각인시킨 책이라 할 수 있다. 열네 살 소녀 소피가 ‘너는 누구니?’라는 발신인 불명의 편지를 받은 뒤 고대 그리스 철학부터 현대 실존주의까지 3천 년에 달하는 서양 철학사에 관심을 갖고 연대기순으로 익혀 나가는 《소피의 세계》는 미스터리 소설을 읽듯 재미와 지식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어 많은 인기를 끌었다. 《소피의 세계》의 후속편 격으로 1997년 12월 출간된 《세실리의 세계》(이용숙 옮김, 현암사) 역시 몸이 아픈 소녀 세실리와 천사 아리엘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누는 이야기 속에 창조와 진화, 감각과 이성의 작용 등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다룬다.

비슷한 시기인 1997년 12월 출간된 카트린 클레망의 《테오의 여행》(양영란 옮김, 동문선)은 불치병에 걸린 14세의 소년 테오가 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세계 종교와 문명의 발상지를 여행하며 얻는 지식과 깨달음을 그린 소설로, 인류학적 관점에서 종교철학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소피의 세계》에서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되던 철학소설의 형식에 점차 ‘여행’과 ‘모험’이란 요소가 가미되는 것은 흥미롭다. 대표적 예로 2001년 3월 출간된 마르쿠스 티이데만의 소설 《메타피지카 공주》(이동희 옮김, 이학사)를 들 수 있다. 형이상학이란 의미의 이름을 가진 훅슬리(올더스 헉슬리의 이름을 패러디했다) 왕국의 공주 메타피지카, 플라톤적 사상을 가진 어머니와 칸트적 사상을 가진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아들 플라토니쿠스-칸티쿠스, 그리고 칼 맑스의 분신인 칼레 막스, 이 세 사람이 행복주(《멋진 신세계》의 ‘소마’를 연상시킨다)로 국민을 지배하려는 국왕의 계획에 반대하며 철학 나라 ‘필로조피카’로 여행을 떠나 위대한 철학자들을 패러디한 인물들을 만나며 다양한 난관을 거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조작된 유토피아에 반기를 든다는 게 이 책의 줄거리다.

철학소설-소년, 혹은 소녀가 모험을 통해 얻는 자기인식의 과정
위에서 예시한 일련의 ‘철학소설’을 살펴보면 몇 가지 유사점이 발견되는데, 첫 번째는 소설의 주체가 소년 또는 소녀라는 점이다. 이는 자아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던질 나이인 이들에게 철학적 문제를 풀어나가게 하는 편이 더 공감을 이끌어내기 쉽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소설의 진행 방식에서 모험적인 요소가 강조된다는 점이다. 이 모험은 《소피의 세계》나 《세실리의 세계》 등과 같이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고, 《테오의 여행》, 《메타피지카 공주》, 《알도와 떠도는 사원》 등에서처럼 물리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모험소설의 얼개를 갖는다는 기본 전제는 같다. 이는 소설을 ‘잃어버린 총체성의 세계를 되찾기 위해 떠나는 자기인식의 여정’의 형상화로 규정하면서 소설의 변별성과 고유성을 모험의 양식으로 부각시킨 루카치의 견해와도 부합된다. 철학소설이 현실과 이상,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사이에서 해답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모험소설의 형식을 빌리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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