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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보고 귀로 즐기는 칵테일 같은 소설-《사랑의 법칙》

by 야옹서가 2001. 8. 12.
Aug. 12. 2001 | 1527년, 멕시코 고대도시 테노치티틀란을 침략한 로드리고 장군은 원주민 귀족 여성 시트랄리가 갓 낳은 아기를 죽이고, 신성한 사랑의 피라미드 위에서 그녀를 강간한 후 노예로 삼는다. 시트랄리는 복수로 로드리고의 아내 이사벨이 갓 낳은 아이를 죽여버린다. 시트랄리를 사랑했던 로드리고는 자신의 손으로 그녀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며, 이사벨 역시 아기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산고가 겹쳐 죽고 만다.

이야기가 시작된 지 20쪽만에 주요 등장인물들이 다 죽어버렸으니, 도대체 《사랑의 법칙》(권미선 옮김, 민음사)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는 걸까? 그러나 이 소설의 작가가 마술적 리얼리즘을 유려하게 표현한 라틴문학 작가 라우라 에스키벨임을 안다면 의구심은 기대로 바뀐다. 《사랑의 법칙》은 16세기부터 23세기까지 7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녀, 연인, 형제 등 다른 생으로 끊임없이 윤회하는 로드리고, 시트랄리, 이사벨의 애증 어린 삶을 공상과학적 요소와 판타지적 요소를 병존시키며 솜씨 있게 풀어나갔다.

윤회사상을 바탕으로 공상과학과 판타지를 결합한 소설
특히 첨부된 음악CD와 원색 삽화는 강간, 존속 살해, 타민족의 침략, 지진 등 충격적인 전생의 경험을 강하게 증폭시킨다. 라우라 에스키벨은 소설 속 상황에 어울리는 음악을 직접 선곡하고, 특정 페이지에서는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도록 했다. 세 사람의 악연이 낳은 또 다른 주인공 아수세나가 23세기의 현생에서 ‘쌍둥이 영혼’ 로드리고를 찾아 떠나는 모험 사이사이에 듣는 푸치니의 오페라 아리아는 전생을 회상하는 중요한 매개체이면서, 독자의 입장에서는 소설 속 인물의 감정에 동화되는 수단이 된다. 또한 독자는 23세기의 주인공들이 ‘기 촬영 사진’이나 ‘과거를 볼 수 있는 점판’등 신비한 매체로 전생의 삶을 들여다보듯 원색 삽화를 보며 주인공의 전생을 관찰할 수 있다. 삽화에 헬리콥터가 등장하면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등, 효과음을 아리아 속에 살짝 집어넣은 것도 ‘전생 여행’을 보다 실감나게 만든다.

작가가 윤회하는 삶을 소설의 소재로 선택한 배경은 이사벨을 지배하는 타락천사 마몬과 아수세나의 수호천사 아나크레온테의 말 속에서 읽을 수 있다. 타락천사 마몬은 “자신의 두 다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위해서는 그 다리를 잘라내는 것 만한 특효약이 없다. 굴욕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굴욕을 당해봐야 하고, 버림받은 기분이 어떤지 알기 위해서는 버림받아 봐야 한다”며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법칙을 강조한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양식과 유사하다. 그러나 수호천사 아나크레온테는 “부정적인 기운이 감도는 파장을 내보내면 결국 부정적인 파장만 되돌려 받게 될 뿐”이라며 “사람의 마음 속에 어떤 에너지가 들어올 지는 그 사람에게 달린 것”이라고 말한다. 마음의 평온은 ‘쌍둥이 영혼’과의 결합 같은 극적인 계기가 아니라,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을 포용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증오의 고리를 끊는 길은 사랑과 포용뿐
이는 아수세나의 전생이 시트랄리와 로드리고가 연인이었을 때 태어난 갓난아기였으며, 이 둘을 질투한 이사벨이 아수세나를 죽였고, 그 업보를 갚기 위해 아수세나가 이사벨의 친딸로 태어났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이사벨은 현생에서도 아수세나를 미워하며 죽음으로 몰고 가지만, 아수세나는 ‘사랑의 법칙’을 따라 이사벨을 용서함으로써 세 사람이 오랜 세월 쌓아온 악업의 고리를 끊는다.

이쯤 되면 ‘사랑의 법칙’이 ‘연애의 원리와 기술’같은 세속적인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삶의 원리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우주의 질서에 불균형을 일으킨 사람만이 균형을 회복시킬 수 있는데, 한번의 생으로는 그 균형을 되찾기 어려우므로 사람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것이 윤회다. 사람들은 증오하는 마음을 풀고 서로를 사랑하게 될 때까지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 만나게 된다. 이것이 윤회의 이유이고 사랑의 법칙인 셈이다. 《사랑의 법칙》은 현대사회에서 더없이 필요하지만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는 덕목인‘사랑과 포용’의 필요성을 소설적 재미로 감싼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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