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제품 | 전시 | 공연

‘패스트푸드의 제국’을 넘어 슬로푸드로

by 야옹서가 2001. 9. 4.

Sep. 04. 2001 | 패스트푸드는 단순히 ‘간편하고 값싸게 한끼를 해결할 수 있는 음식’에 지나지 않는 걸까? 《패스트푸드의 제국》(김은령 옮김, 에코리브르)을 쓴 에릭 슐로서는 패스트푸드 산업의 성장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을 다각도에서 분석한 후 이 질문에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규격화에 따른 효율성을중시하는 패스트푸드의 가치 체계는 음식문화의 차원을 넘어 노동자의 고용 환경, 식중독, 유전자 변형 식품 문제 등 광범위한 영역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디즈니와 맥도날드는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월트 디즈니가 디즈니랜드에서 선전했던 기술만능주의가 레이 크록의 규격화된 맥도날드 조리실에서 재연됐고, 디즈니랜드에서 아이들에게 꿈을 판 것처럼 맥도날드랜드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역시 즐거움과 환상이 담긴 음식을 판다. 장난감을 끼워주는 해피밀 세트 때문에 맥도날드는 미국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장난감 유통업체 중 하나가 됐다. 아이들을 고객으로 삼는 것이 여러 면에서 유용하기 때문에 패스트푸드 업계는 그들을 집중 공략한다. 한 명의 아이를 고객으로 확보하면 그의 부모와 가족까지도 고객이 된다. 또 장기적으로는 어린이들의 입맛을 패스트푸드의 맛과 향에 익숙해지도록 해 패스트푸드를 ‘컴포트 푸드(comfort food)’로 각인 시킬 수도 있다. 패스트푸드가 비만으로 인한 각종 성인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패스트푸드가 가져오는 정치·경제적, 사회적 파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회학자 조지 리처는 이처럼 패스트푸드의 원리가 사회를 지배하는 과정을 가리켜 ‘맥도날드화’라는 용어로 정의한 바 있다.

편리함과 경쾌함의 이면에 숨겨진 패스트푸드 문화의 그늘
실제로 미국 서비스 산업의 대표적 상징인 맥도날드는 미국에서 신규 노동수요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거대고용주다. 음식을 조리하는 것이 아니라 재료를 ‘조립’하는 반복적인 단순업무는 비숙련 노동자, 특히 청소년을 저임금으로 고용하도록 한다. 맥도날드는 언제 어디서나 동질의 음식과 서비스를 보장하기 위해 균등한 품질, 규격화된 재료와 조리방법을 요구한다. 정육업체는 최대의 구매자인 맥도날드가 요구하는 재료를 대량생산하기 위해 패스트푸드점의 분업체계를 그대로 가져와 이주민 노동자나 문맹자 등 저임금 노동자를 고용하는데, 이들은 도축장의 위험한 작업환경에 노출된 채 격무에 시달린다. 패스트푸드와 정육업체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의 결성은 교묘한 방법으로 저지된다. 생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패스트푸드업체, 정육업체, 축산업자들이 서로 얽힌 악순환은 식중독이나 유전자 조작식품의 공포로 사람들을 몰아가기도 한다. 정육업계에 육류를 제공하는 축산업자들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초식동물인 소에게 가금류의 사체나 소의 피 등 동물성 사료를 섞어 먹이는데, 햄버거 패티가 될 이 소들은 사육과 도축 과정에서 이콜리O157 등 병원균의 오염이 우려되는 환경에 집단적으로 노출되기 쉽다. 대량으로 생산되고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음식 재료들은 리콜이 어렵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 생산량 증대를 위해 맥너겟을 만드는 닭의 가슴살 부분을 비대화하고 후렌치후라이의 원료인 감자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등의 ‘프랑켄푸드’ 역시 문제시되는 부분이다.

음식문화를 통해 인간적인 삶의 회복을 시도하는 슬로푸드 운동
슐로서가 제시한 ‘맥도날드화’에 저항하는 방법은 너무나 간단하다. ‘사지 않으면 된다’는 것. 패스트푸드 문화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반맥도날드화’의 대표적 사례는 슬로푸드 운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86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슬로푸드 운동은 현재 전 세계 40여 개 국가에 7만 명에 가까운 회원을 가진 조직으로 성장했는데, 그 심볼마크부터 느림의 미학을 상징하는 달팽이다.

슬로푸드의 3대 지침은 ‘소멸위기에 처한 전통 음식을 지키고, 양질의 재료를 제공하는 소규모 생산자를 보호하며, 소비자에게 미각교육을 한다’는 것이다. 낙타사육과 우유 공급으로 유목생활에 기여한 모리타니아의 낸시 존스, 전통 양봉방법을 고안한 터키의 벨리 굴라스, 전통 바닐라 작물을 보존한 멕시코의 라울 마누엘 안토니오 등 2000년 제1회 슬로푸드 대회 수상자들의 면면을 통해 전통적 영농방식과 작물 보존을 높이 평가하는 슬로푸드 운동의 지향점을 확인할 수 있다.

포도주에 대한 공부와 시음을 위해 마련된 포도주 컨벤션, 젊은이들의 미각교육을 위해 60개에 달하는 최상급 이탈리아 식당들이 1주간 세트메뉴를 저렴하게 제공하는 Taste Week, 아마존 인디언을 위한 병원에 간이식당을 짓거나 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우유공장 재건축 등에 재정을 지원하는 Friendship Tables 등 슬로푸드 본부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행사는 효율성이라는 명목 아래 인간적인 식탁, 인간다운 삶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내에는 경남대 김종덕 교수가 2000년 조지 리처의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시유시)를 번역한 것을 계기로 슬로푸드 운동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슬로푸드 운동을 전파하고 있는 슬로푸드코리아 홈페이지에는 김치, 민속주, 떡, 전통차, 된장 등 한국의 전통음식과 함께 우리밀 살리기 운동본부 등 우리 먹거리와 전통농업을 소개하는 홈페이지가 링크돼 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