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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와 아기 중시하는 대안적 출산문화

by 야옹서가 2001. 10. 9.
Oct. 09. 2001 | 고통 없이 건강한 아기를 낳는 일은 모든 임산부의 희망일 것이다. 한국에서 제왕절개 분만을 선택한 여성이 43퍼센트라는 통계는 임산부가 산고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하는 선택의 폭이 넓지 않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용기를 내어 자연분만을 결심한다 해도, 밝은 조명이 쏟아지는 분만대 위에 결박당하듯 누운 임산부는 환자 취급을 받으며 불안을 느끼기 마련이다. 인권분만을 주장하는 산부인과 의사 미셸 오당의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출산》(장은주 옮김, 명진출판)은 이같은 출산문화에 의문을 제기하는 책이다. 1970년대부터 프랑스 피티비에 병원에서 시행된 분만법의 실례를 다양한 도판과 함께 보여주는 이 책은 이제 막 수중분만, 그네분만 등 대안적 출산문화가 도입되기 시작한 한국 현실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임산부의 본능대로 출산법을 선택하는 인권분만
피티비에 병원에 마련된 분만실 ‘살레 사바지’는 원시의 방이라는 뜻인데, 산모가 몸의 자연스러운 본능에 따라 분만의 자세를 선택할 수 있음을 상징한다. 피티비에 병원에서는 출산 자세를 임산부에게 가르치지 않는다. 임산부는 특정한 자세를 강요하는 분만대 대신 적당히 어둡고 편안한 환경에서 아이를 낳는다. 진통 말기에 이른 여성은 다른 병원에서처럼 등을 대고 똑바로 눕는 대신, 몸을 옆으로 눕히거나 기도하듯 몸을 웅크리고 엎드림으로써 자궁으로 가는 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한다. 진통 막바지에 이르면 대부분 웅크리고 앉은 자세로 아기를 낳는다.

임산부가 원하면 따뜻한 물 속에 들어가 진통을 완화시킬 수도 있으며, 때로는 물 속에서 분만이 이뤄지기도 한다. 수중분만은 피티비에 병원에서 진행되는 독특한 이벤트 중 하나다. 막 세상에 나온 아기가 탯줄과 연결된 채 물 표면에서 헤엄치는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다. 모든 출산과정은 임산부의 본능적 욕구에 따라 진행되며, 의사는 이 과정에서 보조자일 뿐이다. 보통 출산과정을 원활히 하기 위해 실시하는 회음부 절개나 진통제 투여도 이곳에서는 불필요하다.

이 책은 호흡을 조절해 고통을 제어하는 라마즈 분만법 역시 부정하는데, 이는 인간이 가장 본능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분만 과정을 이성으로 제어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출산은 여성이 이성적인 인간으로서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가장 근원적인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임산부가 출산의 고통 속에서 울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욕을 하는 등 이성을 잃어버린 듯한 행동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실제로 그런 행위는 고통을 경감시킨다.

사랑의 호르몬, 옥시토신의 힘
미셸 오당 박사는 출산의 모든 과정에서 의사의 개입을 최소화하라고 주장한다. 출산 전 잦은 초음파검사나 양수검사는 부적절한 개입에 해당한다. 또한 출산 후 첫 한 시간은 산모와 아기를 격리시키지 말고 젖을 물리는 게 좋다. 이때 임산부는 등을 똑바로 하고 앉아 아기가 손쉽게 젖을 물고 어머니의 피부를 자유롭게 만지도록 한다. 아기가 젖을 빠는 행동은 여성호르몬의 분비를 자극해 자궁수축을 유도함으로써 임산부의 몸에서 태반이 쉽게 분리되도록 하는 효과를 낸다.

이와 같은 출산의 과정을 보다 과학적으로 분석한 미셸 오당의 또다른 저서 《출산 속에 숨겨진 사랑의 과학》(장은주 옮김, 명진출판)은 사랑의 호르몬 ‘옥시토신’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자궁수축과 모유수유에 관여하는 호르몬으로 알려진 옥시토신은 자궁수축 시 엔도르핀과 함께 분비돼 모르핀과 같은 진통효과를 낸다. 출산 후 기억력이 가물가물해지는 것과 일시적으로 성욕이 감퇴하는 것은 옥시토신이 임산부를 모성 행동에 집중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공적인 진통제를 투여하면 이같은 자연호르몬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출산의 고통과 모성 행동이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은 마취제를 먹인 어미사슴이 새끼를 돌보지 않는다는 동물실험 결과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미셸 오당 박사가 진통제 투여를 부정하는 이유다. 출산 과정뿐만 아니라 성관계를 할 때나 모유를 먹일 때 나타나는 모든 사랑의 행동에는 옥시토신이 영향을 미친다.

분만기술 이전에 마음가짐을 가르치는 책
이 책의 말미에 소개된 최고의 출산생리학 책, 성경에 대한 언급은 미셸 오당의 주장을 함축하는 흥미로운 해석이다. 지식의 열매를 먹은 죄로 낙원에서 쫓겨나고 고통스럽게 출산하도록 벌을 받은 구약성서 속 이브 이야기는, 지성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 출산에 장애가 됨을 암시한다. 문명의 이기가 인간 호르몬의 변화를 가져와 성욕을 저하시키고, 출산과 수유를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약성서에서 마리아가 어두운 마구간에서 동물들 틈에서 예수를 낳는 장면 역시 가장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포유동물의 자세로 돌아가 아기를 낳는 평화로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셸 오당의 저서는 단순히 고통없는 출산법을 안내하는 책이 아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테크닉이 아닌, 고통과 폭력 없는 자연스러운 출산의 마음가짐이다. 무통분만을 위한 인공호르몬이나 의료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임산부의 내면에 잠재된 본능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내는 자발적인 출산, 환자 취급을 받는 대신 주위 사람들의 축복 속에 이뤄지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출산이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인권분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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