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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초월해 남편 지킨 아내의 사랑-《하얀 개와 춤을》

by 야옹서가 2001. 11. 12.
Nov 12. 2001 | 죽음은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숙명적 사건이다. 지인들이 하나 둘씩 주변에서 사라지고, 동창회 명부에서 공란으로 남겨진 이름들이 늘기 시작할 때, 죽음은 점점 선명해진다.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가 가장 강력하게 잠식해오는 건, 평생을 해로한 배우자가 세상을 떠났을 때다. 흐려져 가는 정신과 쇠약해진 몸을 매몰차게 후려치는 이때의 상실감은 건강한 사람일지라도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 그러나 소설 《하얀 개와 춤을》(최인자 옮김, 북@북스)은 노년을 죽음의 두려움이 지배하는 시간 아닌,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시간으로 묘사해 안도감을 준다. 글쓴이 테리 케이가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이 소설은 1991년 출간돼 미국 사우스이스턴 도서관 협회에서 수여하는 ‘최고의 작가상’을 수상했고, CBS에서 영화로 제작될만큼 호평을 받았다.

샘 노인에게만 보이는 하얀 개
따뜻하고 유머 넘치는 마음을 가졌지만, 우직하고 고집스러운 샘 피크는 팔십 평생을 묘목과 일곱 자녀들을 키우며 살아온 성실한 사람이다. 샘과 57년 동안 함께 살았던 아내 코라가 세상을 떠나자, 자녀들은 몸에 인공관절을 이식하고 보행보조기 없이 걸을 수 없는 아버지를 걱정해 교대로 보살피려 하지만, 독립심 강한 샘은 마땅치 않아 한다. 그런 샘의 주변에 갑자기 하얀 개가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환상과 현실을 오간다.

샘은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만 보이는 이 하얀 개를 떠돌이 개로 여기고 친절하게 대해준다. 낯을 가리던 하얀 개는 어느날 샘의 보행보조기 위에 앞발을 올리고 마치 춤추는 듯한 자세로 함께 걸으며 샘을 기쁘게 한다. 그러나 효성깊은 자녀들은 아내의 죽음으로 충격받은 샘이 노망난 게 아닌가 하며 걱정하는데, 하얀 개를 봤다는 사람이 샘 노인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얀 개가 이른 아침에 밥을 얻어먹으러 온다는 아버지의 말에 두 딸이 얼굴에 검은 스타킹을 쓰고 재를 바른 채 새벽의 미행을 감행하는 장면이나, 혹시 아버지가 마음상할까 싶어 하얀 개가 보이는 척 연기하며 속으로 눈물을 삼키는 딸의 모습은 늙고 병든 부모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충분히 공감할 만큼 가슴 아리게 묘사됐다.

그러나 샘이 쓰러져 질식사할 위기에 놓인 어느 날, 위험을 알리는 표지처럼 길가에 서 있는 하얀 개가 발견되자 자녀들은 아버지의 말을 믿게 된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하얀 개가 보통 개와 다르다는 점이다. 떠돌이 개인데도 늘 서리처럼 하얀 몸을 빛내며, 평소 같으면 난리를 떨며 짖어댔을 근처 개들도 하얀 개를 보고는 짖지 않는다. 흑인 가정부 넬리는 심지어 하얀 개를 초월적인 존재로 믿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샘은 아랑곳없이 하얀 개와 친밀하게 지낸다. 그리고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트럭여행을 남몰래 계획한다. 그의 목적은 모교의 60주년 동창회에 참석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가족애 일깨우는 따뜻한 소설
우여곡절 끝에 하얀 개와 함께 동창회장에 도착한 샘은 동창회 장소에 들어가는 대신 57년 전 아내 코라에게 청혼했던 추억의 장소로 하얀 개를 데려간다. 샘은 짧은 모험을 끝내고 돌아와 자신과 아내의 가계도를 만들며 조용히 여생을 정리한다. 가계도의 나무를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시간도 공간도 뒤로 되돌아갔고, 외로움도 덜어졌기 때문이다.

샘이 암 말기로 혼자 거동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져 곁에 자녀들이 늘 머무르게 되자, 하얀 개는 마치 할 일을 다했다는 듯 그의 곁을 떠난다. 그리고 샘은 임종의 자리에서 가장 아끼는 막내아들 제임스에게 고백한다. 하얀 개는 사실 네 엄마가 나를 지켜주기 위해 다시 돌아온 거였다고, 밤마다 하얀 개가 처녀 시절의 엄마 모습으로 돌아와 내 곁에 잠들었다고.

1970년대 중반, 완고하지만 정이 많고 유머감각 있는 아버지 샘 노인과 일곱 자녀들, 정겨운 옛 친구들이 빚어가는 이야기에 죽은 아내의 현신인 하얀 개 이야기가 교차하는 이 소설은 요즘은 찾아보기 힘든 끈끈한 가족애를 보여줘 잔잔한 감동을 남긴다. 그들의 이야기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좋은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일깨우기 때문에 더욱 애틋한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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