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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사막 같은 황량한 삶 - 《미란》

by 야옹서가 2001. 11. 26.
Nov 26. 2001 | 중국 타클라마칸 사막 근처에는‘미란’이라는 반사막 도시의 유적이 있다. 1천년 전 조성됐지만 점점 건조해져 이제는 폐허로 남은 곳. 윤대녕의 소설 《미란》(문학과지성사)은 이처럼 폐허가 된 사막도시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미란》은 ‘드라이클리닝처럼’ 건조한 삶에 익숙한 남자 성연우가 성은 다르지만 이름이 같은 두 명의 ‘미란’을 사랑하는 과정을 보여주지만, 이 소설에서 사랑은 구원이 아니다. 서로의 모습 속에서 거울 보듯 황량한 현실을 직시하는 계기가 될 뿐이다.

이상과 현실의 다른 이름, 오미란과 김미란
30대의 변호사 성연우는 24살 때 제대기념으로 떠난 제주도여행에서 호텔직원 오미란을 만나 짧은 사랑을 나눈다. 어느 날 신기루처럼 사라진 오미란의 기억을 간직하고 살아온 그에게 두 번째 찾아온 사랑은 공교롭게도 첫사랑과 같은 이름을 가진 항공사 직원 김미란이다. 첫사랑 오미란이 상실한 이상향의 상징처럼 성연우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면, 김미란은 세상과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성연우를 일상적인 가족구도 속으로 이끄는 현실적인 존재다.

오미란과 김미란이 각각 이상과 현실이라는 대립항으로 존재하는 것은 대조적인 삶의 방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두 ‘미란’은 심리적인 외상을 안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오미란이 중학생 때 계모를 살해했던 충격 때문에 자신을 유배시키듯 제주도로, 빈탄과 말레이시아로 떠돌며 죽음을 향하는데 비해, 김미란은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은 시각인 9시 30분이면 담배를 피워야 할 만큼 불안정하지만 자기방어의식으로 삶을 견뎌나간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다.

각각 죽음과 삶의 본능을 상징하는 두 미란을 비교할 때, 삶에 대한 열망 없이 무색무취의 삶을 살아온 성연우가 늘 죽음에 한발을 담고 있었던 오미란에 끌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그가 김미란과 결혼하고서도 오랫동안 오미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녀가 단순히 첫사랑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그에게 오미란의 죽음은 이상향의 상실인 동시에 구원의 가능성을 완전히 잃어버림을 뜻한다.

열망 없는 삶의 공허함
아내 김미란과 아들 준이 그를 현실의 영역으로 이끌지만, 그 힘은 미미하다. 이제 성연우는 “눈앞에 보이는 것들과 은밀하고 끈끈한 타협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 한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만큼 속물적인 인간이 됐으며, 여전히 건조하고 황막한 삶을 이어간다. 그는 아직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타클라마칸의 사막 도시 미란처럼 황량하다.

작가 윤대녕은 소설에 등장하는 두 미란을 통해 “이들이 결국엔 동일인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돌아보면 그 어떤 타인도 항상 나의 일부였다. 내가 들고 있는 거울에 비친 사람은 비록 내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작가 후기에서 밝힌 바 있다. 《미란》은 연애소설의 얼개를 지녔지만, 사랑보다는 삶과 죽음의 본능이 공존하는 삶을 은유하고 있다. 윤대녕이 《미란》 속에서 들고 있는 거울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냉담하게 비추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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