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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 타로의 그림책-헬리콥터의 여행

by 야옹서가 2004. 10. 27.

Oct. 16. 2004 | 아이들은 비행기나 헬리콥터, 자동차처럼 움직이는 기계 종류를 유난히 좋아하죠. 특히 헬리콥터는 윙윙 신나게 돌아가는 프로펠러가 잠자리를 연상시키는 까닭에 아이들에게 더욱 친근합니다. 이런 아이들의 마음 높이에 맞춰 헬리콥터를 의인화한 책이 고미 타로의 《헬리콥터의 여행》(김난주 옮김, 베틀북)입니다. 비록 현실세계에서는 딱딱한 금속 비행물체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만, 그림책 속에서 헬리콥터는 초록색, 분홍색의 앙증맞은 생명체로 다시 태어납니다. 아주 오랫동안 혼자서 외로웠던 남자 헬리콥터가 짝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긴 모험을 떠나게 되거든요.

대개 어린이책 속의 모험은 환상으로 포장되거나 악당과의 대립구조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편이지만, 고미 타로의 헬리콥터들이 벌이는 모험은 조금 다릅니다. 반갑게 짝을 이룬 헬리콥터 한 쌍은 황량한 회색 들판과 거친 바다를 지나, 희미한 불안을 안고 어디론가 쉼 없이 날아갈 뿐입니다.

이들은 거친 폭풍우와 힘겹게 싸우고, 둘이서 힘을 모아 나쁜 헬리콥터를 혼내주기도 하고, 때로 몸이 아프면 가던 길을 멈추고 쉬기도 합니다. 그 여정은 두근두근 신나는 모험이기보다 더없이 쓸쓸하고 황량해 보이지만, 이들은 날갯짓을 멈추지 않습니다. 마치 중대한 사명을 이수해야 하는 사람처럼 비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헬리콥터들은 도대체 왜, 하염없이 어딘가를 향해 날아가는 걸까요? 그 의문은 이들이 아무도 살지 않는 폐허 같은 마을을 지나, 교회 지붕 위에 멈춰 섰을 때 비로소 풀립니다. 어느새 엄마가 된 여자 헬리콥터는 소중한 아기를 낳기 위해 성스러운 장소를 찾아왔던 거예요. 어두운 밤이 지나고 사방을 가득 메운 금빛 햇살 속에, 조그맣고 하얀 아기 헬리콥터들이 무수히 날아오르는 장면은 큰 감동과 여운을 남깁니다. 첫 장을 펼치던 순간부터 묵직하게 이어진 짙은 회색 배경은, 바로 이 한 장면의 극적 효과를 위해 존재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밝고 투명한 수채화로 앙증맞게 그려낸 그림, 닮은꼴의 연상작용으로 벌어지는 유쾌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 고미 타로 그림책의 특징이라면, 온통 회색 일색인 데다 불투명 물감으로 그린 《헬리콥터의 여행》은 전작들과 달리 무거운 느낌입니다. 하지만 고난 속에 성숙해지는 헬리콥터들의 모험은, 마치 우리네 삶의 여정을 은유하는 듯한 진중한 풍경을 보여줍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이 읽어도 적지 않은 감동을 받게 되는 건 이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을 훑어 읽고 줄거리를 파악한 뒤 다시 한번 더 읽어보면, 고미 타로가 헬리콥터의 표정이나 몸 상태를 그릴 때 얼마나 섬세한 배려를 했는지 새삼 느껴집니다. 여자 헬리콥터의 꼬리 부분은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통통해지는데 이는 임신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헬리콥터 눈 모양의 미세한 변화나, 프로펠러 모양만으로 감정을 표현한 탁월한 솜씨도 인상 깊습니다. 《헬리콥터의 여행》은 국내 번역된 30여 권의 고미 타로 책 중에서 비교적 알려지지 않았지만, 독특한 설정으로 엄마와 아이가 함께 읽으면서 서로 다른 즐거움을 얻어갈 수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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