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는 소설로, 감독은 영화로 말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들이 주 무대를 떠나 그림책 위에서 대결을 펼친다면 어떨까? '슬리피 할로우', '유령 신부' 등에서 그로테스크 미학을 선보인 팀 버튼, 그리고 대서사시를 방불케 하는 소설 <반지의 제왕>으로 명성을 날린 존 로날드 로웰 톨킨이 각각 그린 그림책을 소개한다.



먼저  J.R.R.톨킨이 직접 동화를 쓰고 그림도 그린 <블리스 씨 이야기>(자유문학사)를 살펴보자. 역자 후기에 따르면, 톨킨은 1920~1930년대에 걸쳐 <실마릴리온>을 구상하던 무렵 이 그림책을 그렸다고 한다. 이를테면 무라카미 하루키가 장편 소설을 쓰는 동안 머리를 식히려고 에세이를 썼던 것처럼, 톨킨 역시 소설 속에 거대한 환상 세계를 구축하면서 색다른 기분전환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블리스 씨 이야기>는 고지식한 노신사 블리스 씨가, 처음 장만한 노란 자동차를 타고 돌킨스(‘톨킨’을 살짝 비튼 이름) 가족을 방문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대소동을 그렸다. 운전이 서툰 블리스 씨의 차에 치여 어쩔 수 없이 동승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늘고, 마침내 숲속에서 산적 노릇을 하는 봉제곰 삼인조까지 가세하면서 이야기는 점점 꼬여간다. 여기에 블리스 씨가 기르는, 기린처럼 목이 긴 토끼 지래빗(Girabbit)이 등장하는 등 환상과 현실이 유쾌하게 뒤범벅된다.


실제로 톨킨은 1932년 자동차를 구입해 운전을 배우면서 가족과 함께 동생의 과수원을 찾아갔는데, 그 날 두 번이나 펑크를 내고, 제방 벽을 부수는 등 좌충우돌했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이 그림책 속 블리스 씨의 모습에 익살스럽게 녹아 있다. 강박관념 없이 끄적인 듯 만든 그림의 느낌이 살아있고, 톨킨의 고풍스러운 손 글씨를 접할 수 있어 이채롭다. 

그림책 작가로 변신한 감독과 소설가

그로테스크한 팀 버튼의 영화 세계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굴 소년의 우울한 죽음>(새터)을 읽어보자. 사실 이 책은 ‘읽는다’고 말하기에는 멋쩍은 책이다. 수록된 글의 분량이 웬만한 시집보다도 더 짧기 때문이다. 대신 명쾌한 그림으로 상황을 압축해 보여준다. 기괴한 숙명을 타고나 괴짜 취급을 받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주인공들은 신경질적인 펜 선으로 삐뚤빼뚤 그려진다.

 

팀 버튼의 그림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모두 부조리한 관계로 엮여 있다. 예컨대 ‘마른가지 소년과 성냥 소녀의 사랑’에서 마른가지 소년은 성냥 소녀의 열정에 반하지만, 둘의 사랑이 타오르자마자 소년의 온몸도 불타버린다. ‘로봇 소년’에서는 인간인 스미스 부인과 전기 믹서가 혼외정사를 나눈 결과로 로봇 아기가 탄생한다. 한편 표제작인 ‘굴 소년의 우울한 죽음’에서는, 굴 껍질 얼굴로 태어난 아들의 머리뚜껑을 따고 정력제 삼아 삼켜버리는 비정한 아버지까지 등장한다.


두 작가가 만들어낸 등장인물들은 조금씩 비틀린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 닮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세계관이 명확히 다른 만큼 두 책의 분위기도 확연히 다르다.  톨킨은 블리스 씨와 친구들이 우여곡절 끝에 해피엔딩을 맞는 결말로 일반적인 동화책의 기승전결을 따랐지만, 팀 버튼의 그림책 속에는 구원이 없다. 

 

팀 버튼의 세계에서 자신의 결함이나 이해받기 힘든 남다름 때문에 고통 받는 캐릭터들을 기다리는 것은 파국 뿐이다. 그들의 고통은 절망적이다. 순수한 결함 그 자체인 캐릭터에게, 결함을 제거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대처법은 자기 자신의 소멸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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