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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제품 | 전시 | 공연

그 때 그 사슴들은 어디로 갔을까? - 박훈전

by 야옹서가 2003. 12. 17.

 Dec 17. 2003 | 홍익대학교 정문에서 산울림 소극장 방면으로 쭉 걸어가다 보면 전에 없던 조그만 갤러리 하나가 눈에 띈다. 지난 3일 문을 연 숲갤러리다. 상업공간이 넘쳐나는 홍대 앞 거리에서 덩치 큰 미술학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소곳이 선 이 공간에서는 개관기념전으로 재미있는 이벤트 같은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12월 31일까지 열리는 판화가 박훈의 ‘How Many Deer?’전이 그 주인공이다.

판화의 복수성에 주목한 보물찾기 이벤트
판화를 전공한 작가니까 당연히 목판화나 동판화 같은 평면회화가 걸려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전시장에 들어선다면 당혹감을 감출 수 없게 된다. 하얀 벽 위에는 벌레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크고 작은 사슴 무늬가 눈에 띌 뿐이다. 이것은 회화로서의 판화가 아니라, 판화의 대표적 속성인 ‘복수성’을 이용해 환경보존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파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반영됐기 때문이다. 

홍익대학교 판화과(1992)와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 판화과(1997)를 졸업한 박훈은 귀국 후 생태환경보존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일련의 예술프로젝트를 선보였다. 작가는 직접 제작한 복수의 동물오브제, 혹은 대량생산된 기성품의 동물인형을 이용해 야생동물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다. 점차 훼손돼 가는 환경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지만, 단순히 계몽적 구호만 되풀이한다면 듣는 사람도 지루하기 마련. 박훈은 이런 점을 간파하고, 보물찾기 이벤트처럼 흥미를 유발하는 프로젝트로 관람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한다.

예컨대 작가가 1999년 환경의 날을 맞아 녹색연합과 공동주최로 개최했던 ‘반달곰 구출작전’ 프로젝트는 대량생산된 반달곰 인형을 복수 제작된 판화와 동일시한 작품이다. 밀렵꾼의 올무에 걸린 반달곰이 서울 곳곳에 숨어 있다고 가정한 작가는, 1천 마리의 반달곰 인형을 남산, 도봉산, 북한산, 관악산 등 서울 지역 4개의 산에 숨기고, 사람들이 올무에 걸린 반달곰을 구출해 전시장으로 데려오면 자신이 제작한 판화를 선물로 줬다. 판화와 교환된 올무는 야생동물의 생명을 위협하는 인간의 작태를 증거하는 또 다른 전시물이 돼 벽에 걸렸다.

재기발랄함이 돋보이는 생명사랑 메시지
 지금 숲갤러리에 전시중인 ‘How Many Deer?’전 역시 1998년 열렸던 ‘사슴 사냥’ 프로젝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작가가 귀국 후 최초로 개최한 환경예술프로젝트였던 ‘사슴 사냥’ 프로젝트는 5cm 크기의 사슴 석고모형을 1천 개 제작해 판화의 복수 에디션처럼 간주하고, 서울 지역 45개 녹지에 숨겨놓은 뒤 관람객들에게 찾아오게 한 참여예술작품이다. 이 때 2백여 개의 사슴모형이 회수되지 못한 채 서울 곳곳에 남겨졌는데, 박훈은 여기에 착안해 이번 전시를 준비했다.

즉 5년 전 자신이 서울 곳곳에 풀어놓은 사슴들이 무사히 번식을 마쳤다는 가정 하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 벽에 달라붙어 있는 크고 작은 사슴 그림들은 5년 전 ‘그때 그 사슴’들의 개체가 불어난 것이다. 이번 프로젝트에도 역시 박훈은 멋진 상품을 내걸었다. 불어난 사슴이 모두 몇 마리인지 적어 응모함에 넣으면, 정답을 맞춘 사람에게 작가의 오리지널 판화를 선물한단다. 나도 대략 세어봤지만 1천 마리는 족히 넘는 것 같으니, 사슴 수를 한번 세어보겠다는 사람은 시간을 넉넉히 두고 방문하길 바란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없고, 개관시간은 오후 1시부터 오후 10시까지다. 문의전화 02-326-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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