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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제품 | 전시 | 공연

파리 떼로 그린 그림-이중재의 '로망스'전

by 야옹서가 2004. 12. 4.
[미디어다음/2004.12.4] 예술품을 전시하는 갤러리는 대개 쾌적하고 밝은 분위기다. 전시된 그림은 흔히 '화이트 큐브'라는 말로 대변되는, 눈부시게 흰 벽에 걸려 따뜻한 할로겐 조명을 받고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설치작가 이중재(39)의 ‘로망스’ 전이 열리는 청담동 유아트스페이스에 들어서면, 어딘지 모르게 음산한 풍경이 펼쳐진다.

전시공간 내부는 온통 어두컴컴하고, 검은색 대형 봉투가 샌드백처럼 공중에 줄지어 매달려 있다. 전시장 바닥에 깔린 유리판을 밟으며 2층 계단으로 올라가면, 파리 한 마리가 날개 소리 요란히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전시장에 웬 파리?’ 궁금해하며 발길을 옮기면, 거대한 방충망과 마주치게 된다.

동물 우리처럼 4면을 두른 방충망 속에는 조그만 점을 찍어 그린 가족 그림이 공중에 매달려 있다. 언뜻 보기엔 단란한 가족을 묘사한 점묘파 화가의 그림 같다. 평범해 보이는 그림이지만, 이 그림의 재료가 물감 아닌 ‘파리’라는 사실이 놀랍다.

작가는 파리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한국유용곤충연구소에서 2만 마리의 파리 유충을 협찬 받아 전시 오픈 1주일 전부터 갤러리 안에서 배양했다. 번데기에서 나온 파리들이 먹을 것을 찾아다니다가 가족 그림의 윤곽선을 따라 달콤하고 끈적거리는 유인액에 달라붙으면, 파리가 착지한 그 자세로 그림 물감의 역할을 하리라는 데 착안한 것이다.

생물학적 분류를 빌려와 ‘자본문門/제국강綱/국가속屬/가족과種/파리종種’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중재의 파리 그림은, 국가가 경제적 위기에 처할수록 가족 코드가 유행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풍자한다. 국가나 사회가 책임져야할 문제조차 가족에게 떠맡기는 게 모든 문제의 해결책인지 질문하는 것이다. 이중재의 파리 그림은, 파리가 날아가면 언제든 뿔뿔이 흩어질 수 있는 가족 그림처럼, 임시방편적 대책에 허물어지는 삶의 공허함을 보여준다.

“제가 원래 원했던 건, 캔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파리들이 날아올랐다가 다시 들러붙기도 하면서 살아 움직이는 그림이었어요. 그림이 고정된 게 아니라 쇠사슬에 매달려 있거든요. 작동장치도 만들어서 그림이 흔들거리게 했는데, 이를테면 캔버스가 흔들리면 파리가 놀라서 그림이 없어지는 거죠.”

하지만 파리들이 유인액에 들러붙어 버리는 바람에, 처음 머리 속에 그린대로 움직이는 그림은 완성하지 못했다. 또 살아있는 곤충을 재료로 삼았기 때문에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갓 태어난 파리의 크기가 작다는 사실을 계산하지 못해, 많은 파리들이 방충망 밖으로 탈출한 것이다. 오픈 하루 전에 전시장에 도착하니 방충망에 남아있는 파리 반, 바깥으로 탈출한 파리가 반이었다.

결국 밖으로 나온 파리들은 어쩔 수 없이 다 죽였다고. 원래 전시기간 내내 배양을 계속 하려 했지만, 파리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바람에 그마저 통제했다. 이 때의 흔적은 아직도 갤러리에 남아있다. 그림을 자세히 보기 위해 방충망 앞으로 발걸음을 옮길 때, 바삭 소리내며 뭉그러지는 물체가 느껴진다면, 이 역시 십중팔구 죽은 파리의 몸뚱아리다.

원래의 ‘살아있는 파리 그림’ 계획은 절반의 성공으로 남았지만, 다음에는 파리 20만 마리를 모두 성충으로 받아와 재작업을 해볼 계획이라고 한다.

작가 이중재는 “사진이 발명되면서 미술은 이미지 재현의 도구이길 포기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까지 사실적인 그림에만 친밀감을 느낀다”며 “현대미술은 단순히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을 뿐입니다. 갤러리가 사랑방처럼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되면, 현대미술을 보는 시각도 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시는 12월 10일까지 계속된다. 관람료는 무료다. 문의 02-544-8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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