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제품 | 전시 | 공연

결정적 순간’의 매혹…찰나의 거장展

by 야옹서가 2005. 5. 26.
[미디어다음/ 2005. 5. 26]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서거 1주기 맞아 대규모 회고전 열려
현대사진의 거장 앙리 카르티에-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1908~2004) 서거 1주기를 기리는 ‘찰나의 거장’전이 이달 21일부터 7월 17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열린다. 출품된 사진 수만 226점에 달하는 대규모 회고전으로,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을 논할 때 즐겨 인용되는 ‘결정적 순간’을 형상화한 사진 외에도 한 시대를 풍미한 저명인사와 예술가의 모습을 담은 인물사진, 보도사진가 집단 ‘매그넘(MAGNUM)’의 공동창립자로 세계를 누비며 격변하는 시대상을 담은 보도사진을 한데 아우른 ‘완결편’이라 할 만하다.
인도 카슈미르 스리나가르, 1948

언제나 부담 없이 들고 다닐 수 있는 소형 라이카 카메라에 인간의 눈과 가장 가까운 화각을 가진 50mm 렌즈를 즐겨 썼던 카르티에-브레송. 그가 평생을 걸고 추구했던 ‘결정적 순간’의 사진은 단순히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한 사진을 의미하지 않는다.

피사체의 본질과 이를 가장 잘 표현하는 구도의 포착, 빛의 조건, 예기치 않게 등장한 대상물이 특정 순간 합일을 이룰 때 그의 사진은 비로소 완성된다. 그 사진 속에는 무한한 기다림 속에서 건져낸 찰나의 빛이 담겨 있다.

언뜻 보기엔 우연한 스냅사진 같은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에서 묵직한 중량감이 느껴지는 것은 마치 오랜 수도 끝에 불현듯 깨달음을 얻듯 찍은 사진이기 때문이다. 인위적으로 도를 깨우칠 수 없는 것처럼 카르티에-브레송은 연출사진을 거부했으며, 인공조명을 사용하거나 주제를 강조하는 트리밍도 지양했다.

화려한 색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로지 빛과 어둠의 대비만으로 대상의 본질을 표현할 수 있도록 흑백사진만을 고집하기도 했다. 이러한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관은 1952년 출간한 작품집의 영문판 제목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에 응축되어 나타난다.

어렸을 때 화가를 꿈꾸었던 카르티에-브레송은 예술에 대한 애정과 이해를 바탕으로 수많은 예술가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그가 촬영한 예술가들의 면면을 보면 이를 실감할 수 있다. 피사체와 교감하면서 우러나는 자연스러움은 카르티에-브레송의 인물사진에 독특한 빛을 더한다.

점토조각을 어루만지는 자코메티, 애완용 비둘기와 함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마티스, 시가를 손에 든 마르셀 뒤샹, 조용히 한 점을 응시하는 만년의 샤갈, 방심한 상태로 손님을 맞이하는 파블로 피카소의 모습은 20세기 현대미술사를 인물사진으로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하다.

예술가 외에도 특유의 ‘살인 미소’를 날리는 체 게바라, 섹스심벌 이미지 대신 정숙한 아름다움을 드러낸 마릴린 먼로, 반나체로 아들과 노는 로버트 케네디 등 기존의 연출된 이미지를 벗어 던진 저명인사들의 모습도 이채롭다.

하지만 무엇보다 카르티에-브레송의 이름을 사진사에 뚜렷이 각인시킨 사건은 1947년 보도사진가 집단 ‘매그넘’의 창립일 것이다.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세이무어, 조지 로저, 그리고 카르티에-브레송이 의기투합해 창립한 매그넘은 사진가들이 신문이나 잡지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주체적 존재로서 자신만의 시각을 담는 사진을 펼칠 수 있게 기여했다.

1948년 인도 독립운동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의 죽음, 중국 공산당 집권 직전 촬영한 청나라 마지막 환관의 쇠락한 모습, 1960년대 초 베를린 장벽에 매달려 무심코 노는 아이들의 모습 등 인간애를 담은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은 격동의 세월을 견뎌낸 사람들의 이야기로 역사를 증거하는 탁월함을 보여준다.

매주 토요일에는 브레송의 작품세계에 대한 특별 세미나(오후 4시)가 열리며, 매주 수요일 ‘사진작가와의 만남’(오후 6시 30분) 시간에는 강용석, 오형근, 김아타, 김중만 등 현역 사진작가와 함께 대담할 수 있다. 입장료는 성인 9000원, 대학생 8000원, 중고생 6000원. 문의전화 02-379-1268.


 


중국 공산당 집권기 직전에 촬영한 청나라 마지막 환관의 모습. 남의 옷을 빌려 입은 듯 터무니없이 큰 통소매 옷을 입고, 주름진 웃음을 날리는 환관의 모습은 쇠락한 청 왕조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자신이 찍은 사진에 일절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오직 촬영한 장소와 연도를 기록했을 뿐이다. 부연설명이 없기에 오히려 관람자 자신의 눈으로 발견한 사진의 미학에 몰두할 수 있는지 모른다. 뼈대만 남은 것처럼 길쭉하고 앙상한 조각상을 즐겨 만들었던 조각가 자코메티의 초상사진이다. 노 조각가의 시선은 오래된 나무 문짝이 견뎌온 세월을 지그시 바라보는 듯하다.

 

소녀의 머리 바로 위로 가파르게 떨어지는 그림자는 관람자의 시선을 급격히 잡아당긴다. 그림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면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이 만들어낸 빛이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비추는 모습과 조우하게 된다. 길 위에 네모난 ‘빛의 상자’가 생길 때까지, 또 그 상자 속에 누군가 살포시 발을 들여놓을 때까지 브레송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렸을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