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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사 | 칼럼/인터뷰

백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아름다운 책-예술제본장정가 백순덕

by 야옹서가 2001. 7. 24.

Jul. 24. 2001
| 고급스런 가죽으로 표지를 감싸고 금박을 입혀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한 고풍스러운 책, 흔히 예술제본장정이라 하면 이런 책의 외양만을 떠올리게 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프랑스 정부가 공인한 한국 최초의 예술제본장정가 백순덕씨는 ‘책 속에 담긴 내용, 거기에 얽힌 사연, 책에 대한 소장자의 애정 등 책 자체의 존재의미가 충족돼야 아름다운 장정이 빛을 발한다’고 말한다.

불문학을 전공한 뒤 출판사에서 근무하던 백순덕씨가 파리로 유학을 떠난 것은 28세 때인 1991년이었다. 출판 관련 학교만 1백여 곳을 알아본 끝에 1992년 여름 찾아간 UCAD 제본장정학교에서 백순덕씨는 ‘바로 이거다, 내 운명이 바뀌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소질이 있을 걸로 생각지도 못했던 예술 분야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은 컸다. 3년의 교육과정이 끝나고 나서도 예술제본장정 일을 좀 더 익히고 싶어 아뜰리에 베지네를 3년간 다니며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예술장정분야 직업 교원 자격증(CAP)도 획득했다. 그리고 소르본느 파리 1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준비하던 중 경제사정이 악화되면서 한국으로 돌아와 1999년 1월 홍익대 앞에 작업실 ‘렉토 베르쏘’를 차리고 예술제본장정을 시작했다.

“한국에 와서 제일 처음 한 일이 신문사 기자들에게 편지 쓰는 일이었어요. 스무 군데 일일이 손으로 써 가지고 보냈더니 몇 군데서 취재요청이 왔죠. 제가 한 홍보는 그 정도였어요. 포트폴리오를 들고 쫓아다니며 영업 한 것도 아니고, 너무 소극적이죠? 그렇다고 고고한 예술가가 되려는 건 아니지만요. 그냥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요. 다만, 예술제본장정은 국내에서 제가 처음으로 하는 거니까 올바르게 정착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책임감을 많이 느끼죠.”

한달 내내 책 만들어도 겨우 세 권
 예술제본장정에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소비문화를 부추기는 것 아니냐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백순덕씨가 한 달에 만들 수 있는 예술제본장정 책은 많아야 세 권 정도다. 한 권을 완성하면 보통 40만원에서 60만원 정도를 받는 것을 감안하면, 한달 내내 책 만드는 일에만 매달린다고 가정해도 한달 수입은 대졸 사원 초임과 비슷한 정도다. 게다가 백순덕씨는 주문이 들어와도 아무 의뢰나 승낙하지 않는다. 예술제본장정이 의미를 지니려면 어떤 텍스트를 담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 일이 신문에 소개되면서 처음에는 별 사람들이 다 있었어요. ‘내가 재벌 누구누구를 아는데, 그 사람 책에다 금박을 딱 박아가지고 갖다줘라’는 거예요. 그런 일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제가 공감할 수 없는 사람의 의뢰를 받지 않는 건 제게 주어진 선택권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이런 분들도 있었어요. 어떤 분 어머님이 어렵게 자식들을 키우다 돌아가셨는데, 그 어머님이 생전에 대학노트에 쓴 일기장을 제본해 드린 적이 있거든요. 그 일기, 비록 맞춤법도 안 맞지만 얼마나 소중하겠어요? 또 성경 필사한 것을 제본해달라는 주문도 자주 들어와요. 그런 건 성경 내용을 손으로 하나하나 쓴 거라 굉장히 큰 의미가 있죠. 하느님께 바치는 마음의 표시니까요.”

그밖에도 인상깊었던 작업은 문학과지성사의 ‘깊이읽기’ 시리즈를 예술제본장정으로 단장해 김주영, 마종기, 황동규, 이청준 등 10여 명의 작가에게 전달했던 일이다. 정성어린 장정으로 새롭게 태어난 책은 평생 한 길을 걸어온 문인들에게 무엇보다 값진 선물이었을 것이다.

예술제본장정의 본질은 ‘책 사랑하는 문화’
백순덕씨는 지난 5월부터 현암사에서 예술제본장정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현암사 형난옥 주간의 제의로 시작한 일인데 직접 자신만의 책을 만드는 즐거움을 나누는 의미가 있어 애착을 느낀다. 주로 디자인과 학생들이나 출판관계자, 젊은 주부들이 많은데 지금은 초급과 중급 과정이 진행중이다. 또‘아이들은 아직 상상력이 굳어지지 않아 책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어른들보다 다양하고 재미있는 작품들이 나올 수 있다’며 예술제본장정학교의 연장선상에서 아이들과 함께 책을 만드는 일을 계획중이다.

소중한 책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오래도록 보관하기 위한 예술제본장정은 책을 물신화하는 것이 아니다. 책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사온 책의 표면을 닦고 투명 비닐을 곱게 씌워 소중히 간직하는 건 책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경험해봤을 일이다. 재료나 공정이 좀 더 복잡해지긴 하지만 예술제본장정의 의미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백순덕씨가 예술제본장정을 통해 전달하려는 것이 ‘책 아끼는 문화’라고 밝히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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