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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사 | 칼럼/인터뷰

역사의 행간에 묻힌 생활사를 발굴하는 사학자-정연식

by 야옹서가 2001. 8. 14.

Aug. 15. 2001
| “훌륭한 역사가는 전설에 나오는 식인귀 같아서 사람의 살 냄새를 찾아다닌다”던 사학자 마르크 블로크의 말처럼, 옛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녹아있는 생활사를 정리한 대중역사서가 출간됐다. 서울여자대학교 사학과 정연식 교수가 조선시대 생활사에 대한 자료를 모아 펴낸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1》(청년사)는 연대기적 성격의 역사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상생활의 면면이 흥미로운 에피소드 중심으로 전개됐다.

한국역사연구회에서 활동하면서 1996년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청년사)를 공동 집필했던 정연식씨는 생활사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자료를 모아왔다. ‘조선조의 탈것에 관한 규제’, ‘조선시대의 시간과 일상생활’, ‘조선시대의 끼니’ 등 논문도 틈틈이 발표했다. 그렇게 모인 글의 분량이 책 두 권은 너끈히 펴낼 만큼 쌓였고, 이번에 출간한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1》은 그 첫 번째 결과물이다.

기생, 중, 죄인...역사 속에 숨은 조연들
책 속에 펼쳐지는 인간군상은 그동안 역사 속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대상들이다. ‘말을 알아듣는 꽃’이었던 기생, 양반에게 착취당하고 좀벌레 취급을 받았던 중, 공처가 남편을 휘어잡은 여인네들, 처절한 신고식을 치렀던 신참 벼슬아치, 곤장부터 사지를 찢는 능지처사까지 참혹한 형벌을 감수했던 죄인 등 그 양태도 다양하다. ‘마마신’으로 불릴 만큼 공포스러웠던 천연두, 신분과시의 도구였던 말과 가마의 복잡한 규제, 노소를 불문하고 피웠던 담배 등 당시 풍속사도 함께 곁들였다. 예를 들어 책을 읽다보면 ‘학을 떼다’란 말은 학질에서 유래한 것이고,‘경을 칠 놈’이란 말은 절도범의 몸에 절도, 강도 등의 글자를 문신하는 형벌인 ‘경형’에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본문 사이사이에 삽입된 조선시대 사진과 풍속화는 글의 생생함을 더한다.

정연식씨는 《조선왕조실록》이나 《비변사등록》 같은 연대기적 사료에 등장하지 않는 내용을 찾기 위해 옛 사람들이 남긴 일기, 기행문, 판소리, 가사, 소설, 도록, 사전류까지 뒤졌다. 책 말미에 깨알 만한 글씨로 밝힌 참고문헌 목록만 13쪽에 이르니, 연구범위의 방대한 양을 짐작할만하다. 정연식씨는 ‘생활사가 이슈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관심은 많아도 막상 달려들어 연구하진 않는 분야’라며 어려움을 표했다. 일차적인 원인은 일단 자료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지만, ‘생활사를 연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란 학계의 인식도 크게 작용한다. 그러나 정연식씨의 입장은 명확하다. ‘생활사는 역사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이란 게 그의 요지다.

인간의 삶을 알아야 그 삶을 지배하는 굴레도 보인다
“조선 후기 때 3정 문란이 일어나면서, 백성들이 먹고 살수가 없어 민란이 터졌죠. 그런데 이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없다’라고 한 말을 이해하려면 한해 소출이 얼마였고, 한 가족이 일년동안 먹어야 될 식량이 얼마나 되는지, 몇 끼를 먹었고 어떤 걸 먹었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인간의 삶이 어떤지를 먼저 봐야만 그 삶을 지배하는 굴레가 보이는 거예요. 무조건 ‘착취당했다’ 이런 얘기만 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상황도 모르면서 헛된 담론들, 뿌리없는 담론들만 돌아다니는 거죠. 지금은 비판할 처지가 아니에요. 어느 정도 학술적인 성과가 무르익고 결과가 나와야 비판을 하죠.”

사실 생활사라는 학문 자체는 대중들이 접근하기 쉬운 분야가 아니다. 그럼에도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1》이 쉽고 재미있게 다가오는 것은 정연식씨가 ‘논문은 잡문처럼, 잡문은 논문처럼’이란 원칙에 의거해 글을 풀어썼기 때문이다. 그는 생활사를 다루면서 아쉬운 점으로 하층민의 관점에서 쓴 자료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꼽았다.

“어떻게 보면 제 책이 보통사람들의 이야기로 오해될 수 있는데, 양반들이 남긴 자료다 보니 유명인의 삶도 보통사람으로 희석돼 나타나는 것일 뿐이고, 하층민도 양반의 관점에서 본 하층민의 이야기예요. 친구에게 책을 보여줬더니 ‘주로 양반 얘기만 썼냐’고 불만을 얘기하던데, 지금은 양반들이 남긴 자료밖에 없어요. 예컨대 노비가 쓴 일기가 하나 나오면 국사학계가 발칵 뒤집혀서 전부 다 논문 쓰겠다고 덤벼들 거예요.”

정연식씨는 올 10월경 청년사에서 이번 저서와 한 쌍을 이루는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2》를 펴내기로 했다. 이 책에는 ‘호환’으로 불렸던 호랑이, 노비의 삶, 시간 개념, 고문과 취조, 이혼, 끼니, 뒷간, 유배 등에 얽힌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다. 또한 올 연말에는 연구논문 《군역법 연구》를 서울대출판부에서 출간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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