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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사 | 칼럼/인터뷰

30대의 들판을 내달리는 축구선수처럼 살고 싶다-소설가 김별아

by 야옹서가 2001. 9. 11.

 Sep. 11. 2001 | 대개 ‘∼처럼 살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하는 글은 많지만, ‘∼처럼 죽고 싶다’는 표현은 잘 쓰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소설가 김별아씨는 독특하게도 첫 산문집 이름을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이룸출판사)로 정했다. 작가로서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렸지만 83살에 모든 걸 버리고 훌쩍 떠나 “그래, 끝이구만. 별것도 아니구만…”이란 말을 남기고 객사한 톨스토이. 김별아씨는 그를 통해 죽음의 신비주의를 걷어낼 수 있었다. 20대와 영원히 작별하고 결혼과 출산을 경험하며 삶에 대한 신비주의를 걷어낸 30대의 눈은 세상을 어떻게 관찰할까. 그 해답을 35편의 산문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김별아씨는 ‘여행은 가고 싶은데 애를 맡길 핑계가 없어서’산문집을 펴냈다고 눙친다. 서른 두 살의 겨울을 넘기기가 유난히 힘들었던 작년, 그녀의 머리 속에는 여행가서 글쓰고 싶은 생각과 일상을 벗어나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끓었다. 책을 내겠다니까 부모님도 선뜻 아이를 맡아줬다. 그렇게 한달 간의 인도·네팔 여행을 다녀온 후 정리한 기행문과 틈틈이 새로 쓴 산문들을 묶어 펴낸 결과물이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다. 뭄바이에서 바라나시까지 직행하는 28시간의 입석 기차여행, 바라나시 화장터의 타오르는 시체 사이에서 느낀 삶과 죽음의 교차 등 인도·네팔 여행기는 이 산문집의 백미다.

30대, ‘사자의 날들’ 속에서 부딪치는 삶의 체험
사람의 나이를 동물에 빗댄 탈무드의 알레고리에 따르면 김별아씨는 이제 ‘사자의 날들’인 30대로 접어들었지만, 그녀가 체감한 30대는 강하거나 자신만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들판을 누비는 사자처럼, 힘과 열정이 넘치는 축구선수처럼 내달리는 대신, 그는 현실 앞에서 ‘행복한 항복’을 하고 마는 자신을 발견하고 우울해하기도 한다. 여성적인 것을 부정하면서 ‘명예남자’의 삶을 살아온 그였지만 결혼은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이었다.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면서 변화한 삶의 방식, 보통사람들처럼 살아보겠다고 광고회사에 취직한 첫날 탈취제 광고카피를 움켜쥐고 발버둥치다 퇴근이 곧 퇴사가 된 일, 전화기를 전자렌지에 넣은 건망증 사건 등 책 속에는 ‘글을 쓰는 생활인’의 체험이 그대로 녹아들었다.

“사실 예술가에 대한 일반인의 동경 이면에는 일종의 혐오감이 있어요. 생활에 대한 무능함이라든가…. 결혼 전에는 부모님이 지원해주셨고 지금은 남편의 지원을 받지만, 전업작가 분들은 힘들죠. ‘저는 글 쓰는 걸 직업으로 생각 안 해요. 우아한 취미죠’라고 얘기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최선을 다하고 있지 못한 걸 괴로워하면서 전업하시는 분들을 부러워할 때도 있어요.”

《개인적 체험》, 《내 마음의 포르노그라피》 등 주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발표해왔지만 최근 김별아씨의 생각은 많이 변했다. 천편일률적인 현실을 쓰는 게 이제는 너무 지리멸렬해졌다는 것. 인정을 받건 안 받건, ‘김별아’만의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전과 전혀 다른 소설을 준비중이라고 귀띔한다.

“소설가로서 성공하고 싶은 욕망 같은 건 없어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어줬으면 하는 소통의 욕구는 있죠. 그런 것도 없다면 일기처럼 혼자 쓰고 라면박스에 숨겨놓지 뭐 하러 발표하겠어요, 종이 아깝게. 원하는 게 있다면 제가 쓰고 싶은 것만 쓰는 거예요. 남들의 시선뿐만 아니라 스스로 실망하지 않을 글을 쓰는 게 바람이에요. 많은 책을 낼 것도 아니고 글 쓰는 걸로 먹고 살 것도 아니니까. 소설 쓰다가 나중에 나이 들어서 러브호텔 하나 차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요.”

미리 얘기했다가 뒷수습이 안되면 어떻게 하냐며 망설이던 김별아씨가 밝힌 차기 작품은 뜻밖에도 축구 소설이었다. ‘2002년 월드컵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수원구장에 가서 자원봉사를 해볼까’까지도 생각했다가 결국 축구소설을 쓰기로 했다고 한다.

미개척 분야인 축구소설에 도전하는 재미, 쏠쏠하죠
“지금 구상중인데 굉장히 어려워서 머리에 쥐가 나고 있죠. 축구 전쟁 얘기거든요. 1969년에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멕시코월드컵 북중미 예선전에서 축구를 하다가 전쟁이 났어요. 그걸 모티브로 쓰고 싶은데 그 얘기 자체만으로는 짧아서 고민이에요. 배경이 된 곳이 라틴아메리카인데 그쪽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기도 하고. 요즘 그것 때문에 자료 모으고 공부도 하는데, 워낙 뭔가에 대해 새로 공부하는 걸 좋아하니까, 재미있어요.”

말을 맺고 가방을 여는 김별아씨의 손에는 창해ABC 문고 《축구》가 들려 있었다. 생각해보니 축구소설을 쓰고 있다는 그의 말이 아주 뜻밖인 것도 아니다. 이번 산문집에 ‘축구처럼 살고 싶다’라는 글이 실린 데다, 가장 매력적인 남자로 축구선수 바티스투타를 꼽는다는 그이기 때문이다. 힘과 열정이 넘치는 축구선수의 삶을 작품 속에서 대신 사는 삶이라-역시 이단을 꿈꾸는 그녀가 '사자처럼 30대를 내달리는' 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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