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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사 | 칼럼/인터뷰

거품 속의 비수 같은 숨은 예술가를 찾아서― 미술평론가 박영택

by 야옹서가 2001. 9. 16.

Oct. 16. 2001
| 한 작가를 평가하는 가장 큰 기준은 무엇일까? 당연히 작품의 질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적어도 한국 미술계에서 작품의 질은 ‘선택사양’에 지나지 않는다.
화랑주와 컬렉터가 요구하는 좋은 작가의 기준은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 수상경력이 있는지, 지금 어느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지, 심지어는 집안이 얼마나 좋은지 등 작품 외적인 요소가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연, 인맥과 무관하게 작품에만 몰입하는 작가들은 작품을 평가받고 판매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화단의 제도와 권력에 얽매이지 않는 숨은 작가들
현재 경기대학교 미술학부 교수로 재직중인 미술평론가 박영택씨(38)는 이 같은 미술계의 병폐를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지켜봐 온 이 중 하나다. 10년 가까이 금호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수천 명의 작가들을 만났지만, 그의 마음에 가장 깊은 여운을 남긴 사람들은 세속적 욕망을 모두 비운 채 창작에만 전념하는 숨은 작가들이었다. 그가 펴낸 《예술가로 산다는 것》(마음산책)이 숨어사는 작가들의 작업실 기행문이 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박영택씨의 글에 김근태, 김을, 청도, 박정애, 박문종, 염성순, 정일랑, 김명숙, 최옥영, 정동석 등 작가 10명의 작품 도판과 사진가 김홍희씨의 작업실 사진이 어우러진 책은 지상기획전을 방불케 한다.

“숨어사는 것은 세상과의 절연이라기보다 화단의 제도와 권력에 얽매이지 않는 삶을 의미해요. 또 현실적인 이유로는 도시에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에 시간을 뺏기게 되고 높은 집세를 감당하기 힘드니까 시골로 내려가는 것이죠. 결국 작업을 위해서 시간과 공간을 확보한다는 겁니다. 이들의 삶을 지켜보면, 도대체 어떤 힘이 그들을 이토록 그림에 전념하게 이끄는 걸까 싶기도 하고 작가로서 산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박영택씨가 소개하는 숨은 작가들의 작업실은 전원주택에 딸린 아틀리에가 아니라 시골의 버려진 농가나 폐교된 학교 교실이다. 이들은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만큼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을 작업에 투자하기 때문에 궁핍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목수 일로 생계를 꾸려 가는 김을, 공사판 막일꾼으로 일하는 정일랑, 고기잡이 배를 타는 선원 청도 등의 예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거친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림을 팔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도, 자신의 작업에 거창한 의미부여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이들은 그럴듯한 장소에서 전시를 하고 작품을 팔겠다는 욕망은 접어두고 창작에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꾸준히 작품을 전시하는 것으로 외부와 소통하는 계기를 찾는 것도 이들의 공통점이다.

그림 이외의 모든 욕망을 무화시킨 삶의 진정성
“오늘날 예술은 지나치게 상품화됐어요. 현대미술 역시 논리화되고 개념화되면서 새로운 개념들로 이뤄진 철학적인 아이디어 게임이 되어 가지 않습니까? 게다가 좋은 작가들이 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거기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큐레이터나 평론가들이 해야 할 일인데, 최근에는 대규모 외국전시의 커미셔너가 되거나 자신의 입지를 높일 수 있는 기획전에 치중하는 경향이 많아요.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페미니즘이나 몸에 대한 전시가 대부분이지요. 이슈가 되지는 않지만 좋은 작가들이 지속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이라든가 공동 아틀리에를 마련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박영택씨는 이 책에 소개하지 못한 다른 좋은 작가들의 이야기를 좀 더 추려서 지금보다 단단한 짜임새를 가진 책으로 묶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해외 유명작가의 아틀리에를 순회하며 미술사와 야사를 곁들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기행문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만, 이미 신화로 자리잡은 작고작가들이나 중견작가들에게만 관심이 집중되는 미술계의 현실에서 이처럼 그림 이외의 모든 욕망을 무화시킨 삶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작가들의 삶을 보여주는 책은 드물다. 큐레이터로 일하며 숨은 작가들을 발굴했던 그가 이번에는 책 위에 작가들의 발언대를 마련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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