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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사 | 칼럼/인터뷰

아내폭력은 ‘집안 일’이 아닙니다 - 여성학자 정희진

by 야옹서가 2001. 9. 26.











Sep. 26. 2001
| 공적인 장소에서의 폭력과 달리, 가정 내에서의 폭력은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거나 ‘집안 일’이라는 이유로 은폐돼온 것이 현실이다. 특히 가부장제 사회 내에서의 가정폭력은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이라는 문제와 결부돼 복잡한 양상을 띠며, 그 유형도 성적 학대, 의처증, 남편의 경제적 통제, 무능력, 협박, 알콜 남용, 시집과의 갈등, 외도, 폭언 등 언어적, 심리적, 육체적, 경제적, 성적 폭력을 동반한다. 정희진씨의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또하나의문화)는 이처럼 여성이 가정 내에서 경험하는 폭력을 ‘아내폭력’으로 정의한다.

서강대 종교학과 재학시절까지만 해도 여성문제에 관심 없는 ‘운동권 명예남성’이었던 정희진씨는 1992년 대학을 졸업하면서 시작한 ‘여성의 전화’ 일을 계기로 여성 현실에 눈떴다. 5년 간 여성의 전화에서 일하면서 느낀 문제의식을 뒷받침할 이론 연구를 위해 정희진씨는 1997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여성학과에 입학했고, 3개월간 피해여성 45명을 심층면담하고 가해남성 5명과 10회의 집단상담을 거치며 얻은 자료를 토대로 아내폭력의 근본 원인을 규명하는 석사학위논문을 써냈다.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는 이 논문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아내를 때릴 수 있는 권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정희진씨는 아내폭력을 알콜중독, 스트레스, 가난 등 남편이 때릴 수밖에 없는 이유에 초점을 맞춘 기존의 관점은 남편이 아내를 때릴 수 있다는, 즉 여성억압이 당연하다는 전제 하에 성립되는 것임을 지적한다. 정희진씨가 아내폭력 문제를 ‘왜 아내를 때리는가’가 아닌, ‘아내를 때릴 수 있는 권력은 어디서 나오는가’에 초점을 맞춰야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소수의 일탈계층 사람들만이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한국여성 중 50퍼센트 정도가 폭력을 경험하고 있어요. 다만 은폐돼있을 뿐이죠. 남자가 실직 등으로 성 역할을 제대로 못할 때, 여자가 남자를 때리나요? 오히려 기 살리기 운동을 해야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여자들이 성 역할을 못했다, 그럼 아내폭력의 이유가 되죠. 폭력은 ‘아내를 가르치는 행위’가 되고요. 여자가 성 역할을 못했을 때 맞는다는 건, 여자의 성 역할이 자신을 위한 게 아니란 걸 증명해요.”

여성들이 아내폭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보복에 대한 공포 때문이지만, 기존의 연구에서는 그런 요소가 가장 무시되고 여성의 경제적 무능력이나 자녀 문제 등이 강조된다고 정희진씨는 지적한다. 또한 ‘폭력으로 가정이 파괴되어선 안 된다’는 가족유지적 논지는 오히려 아내가 당하는 폭력을 강화시킨다고 말한다. 가족의 형태에 대한 사회의 편견 역시 피해여성을 억압하기는 마찬가지다.

“여성들이 폭력을 피해 집을 나가는 걸 가정파괴로 생각하는 건 가해남성의 입장에서 본 것이죠. 여자들이 집을 나와 혼자 사는 것도 일종의 가정인데, 우린 특정한 형태의 가정만 정상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가정폭력 중에서 이혼이란 이슈는 여성이 힘을 갖는 과정에서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하나의 계기일 뿐이지만, 폭력을 거부하는 건 인간의 기본 권리입니다. 그런데 여성의 기본 인권과 ‘참아야 한다’는 성 역할이 충돌하면서 여성을 묶어두기 때문에, 여성은 그런 기본권도 없는 사유재산 같은 존재로 취급되죠.”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과거의 경험을 해석할 때 치유는 이뤄진다
정희진씨는 불행한 사건을 잊으라고 말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여성이 자신의 시각으로 과거의 경험을 해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내적 치유가 이뤄진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같은 치유는 고통스런 경험을 은폐하기보다 겉으로 드러내고 공론화시켜야만 가능한 일이다. 일상 속의 폭력과 권력의 관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그녀는 앞으로 국가폭력 문제에 대해 공부를 계속할 생각이다.

“광주항쟁도 그렇지만 4·3사태 같은 경우는 정말 제노사이드거든요. 또한 거기에는 가부장제가 많이 개입해있어요. 저는 절대 ‘가정폭력은 작은 문제, 국가폭력은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떻게 인간의 고통이 위계화될 수 있겠어요? 국가폭력 역시 일상에서의 폭력이 누적돼 작동하는 거예요. 일상의 폭력이 실제 전시 폭력으로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연결고리, 그 구조를 밝히는 것이 앞으로의 제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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