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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사 | 칼럼/인터뷰

그리스 가부장제 사회가 ‘여신 죽이기’ 앞장섰죠 - 철학자 장영란

by 야옹서가 2001. 10. 31.

Oct. 31. 2001
| 그리스 신화 중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신을 말해보라고 하면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여신이 헤라다. 그런데 이 헤라는 ‘변변히 하는 일도 없이 질투와 간계를 일삼고 영웅들을 못살게 굴기만 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원래 위대한 대지모신(大地母神)이었던 헤라가 왜 그리스신화에서는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전락했을까? 그리스 철학을 전공한 장영란씨가 펴낸 《신화 속의 여성, 여성 속의 신화》(문예출판사)는 이런 의문점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녀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 내에서 결혼이라는 가부장적 제도를 통해 남편과 아내 자식간의 위계질서가 성립되면서 헤라나 아프로디테처럼 결혼한 여신들은 귄위를 잃게 되고, 아르테미스나 아테나 같은 처녀신들은 힘이 어느 정도 축소된 상태에서만 자신의 기능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악처로 묘사된 헤라는 가부장적 사회의 희생양
“처음에 제우스는 주로 여인네들이나 여신들을 쫓아다니면서 바람이나 피우는 별 볼일 없는 날씨의 신이었고, 헤라는 아르고스 지방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대지모신(大地母神)이었어요. 그런데 헤라는 제우스와 공식 결혼을 하면서 그에게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흡수당하죠. 여기서 제우스가 ‘바람피운다’는 게 굉장히 중요한데, 그가 여러 여인들과 관계를 맺는 건 여신들이 가진 능력을 흡수하는 과정을 상징해요. 제우스는 헤라 뿐 아니라 법이나 규범을 의미하는 테미스, 지혜를 의미하는 메티스, 기억의 여신 무네모시네 등과 관계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올림푸스 최고의 신으로 등장하죠.”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인 여신이 변형되는 것은 단지 그리스신화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바빌론 신화를 보면 여신이 젊은 남신에게 살해되거나 괴물로 변형되고, 기독교 신화에서는 여신이 완전히 축출되고 이브와 마리아, 즉 여인들만 남는다. 장영란씨는 이처럼 신화 속에서 왜곡된 여신의 모습과 함께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여인들에게 적용된 변형과 굴절의 역사를 분석했다. 그녀는 아들인 오레스테스에게 살해당한 클뤼타임네스트라에게서 어머니 살해에 얽힌 가부장제 신화를 읽어내고, 아들을 죽인 비정한 어머니로 묘사된 메데이아를 재조명했다. 남편 대신 죽음을 선택한 알케스티스의 결정이 당시 사회적 규범에 따른 반강제적 선택이었음을 추적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흥미진진하다. 장영란씨의 관심은 동성애가 만연했던 그리스 사회와 여성 혐오증의 관계, 여성이 악의 원천으로 묘사된 이유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을 넓혀나간다. 이처럼 신화와 고대비극 속에 등장하는 여성 폄하의 양상은 그리스 사회의 가부장적 억압구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 그녀의 논지다.

“일반적인 가부장 사회와 마찬가지로 그리스에서 여성의 지위는 그다지 좋지 않았어요. 여성이 재산목록에 올라가는 사회였으니까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남긴 문헌을 살펴봐도 여성은 생물학적인 의미나 정신적인 측면에서 불완전한 ‘불구인 남성’으로 묘사됐죠.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선 인간 축에 끼지 못하는 존재로 노예, 아이, 여성을 꼽았어요. 여성의 참정 기회도 거의 없었죠. 독립적인 집단을 갖고 있었던 시인 사포나, 페리클레스의 첩이었던 여성 같은 경우는 가족제도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활동이 가능했던 겁니다.”

신화는 외국문학 이해를 위한 기본자료
장영란씨는 최근 한국에서 그리스 신화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이유로 신화가 상상력의 원천임을 꼽는다. 근대에서 현대 초기까지가 이성과 합리성이 지배한 사회라면, 현대는 상상력이 가장 부각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영란씨는 이제 입문서가 아니라 전문성을 지닌 신화 책이 필요하다고 보고, 신화전문가 케레니의 신화서적 두 권을 후배와 공역해 궁리출판사에서 《그리스의 신들》과 《그리스의 영웅들》이라는 이름으로 펴낼 예정이다. 신화에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근친상간이 많이 등장하는데, 국내에 주로 알려진 토마스 벌핀치의 신화서는 어린이나 청소년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얘기들이 다 제거됐다. 그러나 케레니는 이런 여러 가지 전승들을 다 언급해놓았다는 것. 제대로 된 신화서적은 특히 외국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기본 자료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신화 연구와 더불어 철학사의 줄기를 제대로 세워나가는 것도 장영란씨의 계획 중 하나다.

“기존에 알려진 남성 철학자 이야기와 함께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철학자 이야기가 온전하게 균형 잡힌 철학사를 새로 쓰고싶어요. 그 전에 소개하는 차원에서 우선 여성철학자들에 대한 글도 써 볼 생각이 있어요. 흔히 말하는 정통적인 철학적 주제가 아니고 자료 자체도 부족해서 복원작업이 어렵긴 하겠지만, 의의 있는 작업이 될 겁니다. 제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건 여성이든 남성이든 소외된 인간 유형을 분석하면서 철학을 도구로 문화운동을 하는 겁니다. 제가 여성의 시각으로 그리스신화를 분석하면서 ‘특별히’ 여성주의적 관점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고 밝힌 건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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