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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사 | 칼럼/인터뷰

발끝을 짜릿하게 감싸는 퓨전 스타일리스트 - 신발디자이너 이겸비

by 야옹서가 2001. 10. 31.

 Oct. 31. 2001
| 나이키 스타일의 가죽운동화 옆면에 한복을 입은 요염한 여인의 모습을 프린팅한 ‘어우동 운동화’, 높이가 10센티미터는 됨직한 구두 뒷굽에 ‘나가자, 진로소주의 맛’이란 뜻의 한자를 새긴 ‘진진로미소주(進眞露味消酒) 구두’, 복슬복슬한 토끼털가죽 위에 보라색 메탈가죽으로 바를 정(正)자를 새긴 ‘바르게 살자 슬리퍼’. 세상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 듯한 독특한 신발을 만들어내는 신발디자이너 이겸비씨의 작품들이다. 원색적인 화려함과 수수한 아름다움, 진지함과 장난스러움이 묘하게 어우러진 그녀의 신발은 톡 쏘는 탄산음료처럼 자극적이면서도 달콤한 매력을 지녔다. 발을 살짝 집어넣는 순간 찌릿, 전기가 통하거나 작은 소용돌이가 이는 건 아닐까 하고 상상할 만큼이라면 설명이 될까.

동양풍과 미래지향적 요소가 섞인 퓨전 스타일
1973년 생인 이겸비씨는 나이에 비해 일복이 넘치는 편이었다. 3년제 패션학교 에스모드를 졸업하고 1994년 이신우컬렉션에 입사해, 빈치스 벤치, 이작을 거쳐 쌈지로 회사를 옮기면서 감각적인 디자인은 더욱 물이 올랐다. 쌈지의 천호균 사장이 신규 브랜드를 만들어보자고 제의한 지 한달 반만에 ‘니마’를 성공적으로 출범시켰고, 최근에는 근미래를 무대로 한 SF영화 ‘예스터데이’주인공의 신발디자인을 맡았다. 그녀는 재충전을 위해 9개월 간 휴직하는 동안 신발디자인에 대한 책 《슈즈》(문화마당)도 펴냈다. 세계적인 명품 신발 소개부터 신발디자인을 배울 수 있는 곳 안내, 구두공장 탐방, 작업지시서 작성법에 이르기까지 신발디자인에 대해 관한 정보를 풀어쓴 《슈즈》는 신발디자이너를 지망하는 학생들이나 패션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신발 쪽을 좀 더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주로 호응을 얻었다.

“《슈즈》는 작년 이맘때부터 생각하고 1년 동안 신나서 준비했어요. 그동안 신발디자이너로 생활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도 쌓이고, 이걸 기록해놓으면 재밌겠다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한 달이면 다 배우는 신발디자인’식으로 디자인 매뉴얼이나 색깔 조합을 다룬 책을 원한 디자이너 분도 계셨는데, 저는 교재를 만들려고 한 건 아니거든요. 사실 저도 하루하루 쌓아가면서 배우는 입장인데, 같이 일하고 있는 디자이너들에게 뭔가를 가르칠 수는 없다고 봐요. 다만 저보다 신발디자인에 대해 잘 모르거나 알고 싶어하는 분들과 공감하고 싶었어요.”

 《슈즈》의 내용 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이겸비씨가 제작한 독특한 신발들의 사연과 사진을 올려놓은 세 번째 장이다. 이른바 ‘겸비 스타일’이라 부를 법한 그녀의 작품들은 동양풍과 스포티한 느낌, 미래지향적 요소가 혼합된 것이 특징이다. 조형적인 변화를 다양하게 줄 수 있는 통굽을 선호하고 구두에 운동화 스타일의 역동적인 선을 접목시킨 작품도 종종 눈에 띈다. 이겸비씨가 디자인 소스를 얻는 장소로 충무로 오토바이 상가, 동대문 운동용품 상가, 인사동 거리 등을 소개한 것도 흥미롭다.

야성미와 지성미가 공존하는 원더우먼의 이미지가 좋아요
“1, 2년 사이에 퓨전에 대한 언급이 많아졌는데, 원래 서로 다른 것이 겹쳐지는 이미지를 좋아했어요. 철 소재에 그림을 새기거나, 가죽과 원단처럼 이질적인 소재를 매치하거나, 아니면 극단적인 아이디어를 함께 사용한다거나. 제 성격만 해도 빙산의 일각처럼 보여지는 부분과 그 반대쪽 부분이 있는 것처럼, 서로 다른 요소가 굉장히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원더우먼 이미지, 이런 걸 굉장히 좋아했어요. 원더우먼은 변신하면 아마조네스처럼 섹시함과 야성미가 넘치지만, 평소에는 아주 지적인 비서로 나오잖아요. 예전에 영국을 좋아한 것도 굉장히 전통적인 부분과 진보적인 부분, 펑키한 부분이 공존해서였기 때문인 것 같아요.”

지난 9월 말 쌈지에 복직해 또 다른 신규 브랜드를 준비하고 있는 이겸비씨는 신발을 디자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언젠가는 직접 가죽을 칼질하고 미싱질을 해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힘으로만 신발을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아직 한국에서 신발디자이너들이 직접 제작까지 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것이 가능해지면 보다 자유로운 발상의 신발이 나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궁극적으로는 페라가모, 구치 등 명품 브랜드들처럼 자신의 이름을 건 부띠끄를 내는 것도 희망사항이다. 한때 만들어 판매했던 개인브랜드 ‘키스더퓨쳐(KISSTHEFUTURE)’는 그런 꿈을 이루기 위한 실험적인 시도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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