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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사 | 칼럼/인터뷰

잠자는 토박이말 깨워내는 우리말 지킴이 - 장승욱

by 야옹서가 2001. 11. 21.

 Nov 21. 2001
| 총각김치는 총각무로 담근 김치다. 그럼 홀아비김치도 있을까? 농담 같지만, 사전을 찾아보면 정말 있다. 그렇다고 홀아비로 담근 김치는 아니고, 무나 배추 어느 한 가지만으로 담근 김치를 말한다. 무와 배추를 잘게 썰어 섞은 김치는 써레기 김치, 절인 배추·무·오이를 썰어 젓국에 버무린 김치는 섞박지라고 한다. 무청이나 배추의 지스러기로 담근 덤불김치, 보통 김장김치보다 일찍 담가 먹는 지레김치, 봄이 될 때까지 먹을 수 있게 짜게 담근 늦김치, 국물이 많아 건더기가 둥둥 뜨는 둥둥이김치, 갓 담가 안 익은 날김치, 푹 익은 김치인 익은지… 김치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의 종류만 해도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이렇게 정겹고 독특한 토박이말도 사용하지 않으면 죽은 언어가 되게 마련이다.

장승욱씨가 토박이말 2천7백84가지를 생활, 자연, 사람, 세상, 언어의 다섯 분류로 나눠 소개한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하늘연못)를 펴낸 것도, 이처럼 사전 속에 파묻힌 채 잊혀져 가는 토박이말을 되살리기 위해서다. 그가 펴낸 토박이말 관련서만 이번이 네 번째다. 책 제목도 바람이나 병 때문에 채 여물지 못하고 떨어진 열매(도사리)를 줍듯 애틋한 마음으로 토박이말을 소개한다는 뜻에서 정했다. 단순히 단어와 그 뜻만 소개한 것이 아니라 글쓴이의 체험이 녹아있는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는 토박이말을 버무려 만든 맛있는 에세이라 부를 만하다.

“요리로 친다면, 사전은 재료예요. 이 재료에다 ‘재미’라는 맛나니, 즉 조미료를 듬뿍 치고 요리로 만든 게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죠.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낱말들을 쭉 모아서 《주간조선》에 ‘우리말 갈무리’라는 제목으로 4년 간 연재한 글입니다.”

바람에 떨어진 열매를 줍는 촌부의 심정으로 수집한 토박이말들
예컨대 가수 구창모의 히트곡인‘희나리’는 흔히 꽃 이름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의 책을 읽으면 ‘덜 말라서 생나무로 있는 장작’임을 알 수 있다. 그는 희나리의 뜻을 설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노래 가사와 연결시켜‘변치 않는 사랑’을 읽어낸다. 또 김치의 토박이말을 진지하게 열거하다가도, 그 중에서 제일 맛없는 김치는 ‘기무치’라며 뼈있는 유머를 슬쩍 끼워 넣기도 한다. 동음이의어를 사용한 언어유희도 심심찮게 등장해 글을 읽다보면 ‘이 단어를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며 웃음짓게 된다.

그가 토박이말을 수집하게 된 것은 1985년 군에서 제대하고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복학할 무렵이었다. 표준국어대사전부터 분류사전, 역순사전 등은 물론이고 《임꺽정》, 《혼불》 같은 소설에 이르기까지 그가 수집한 토박이말의 출처는 다양하다. 특히 낱말의 마지막 글자 순에 따라 사전에 등재한 역순사전은 같은 어미로 끝나는 말을 비교할 때 큰 도움이 됐다.

졸업한 후 신문기자로 취직해 7년, 또 방송기자로 7년을 보내면서 틈틈이 토박이말 수집을 하고 시집 《중국산 우울가방》(1998)을 펴내기도 한 장승욱씨는, 문학에만 전념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현재 프리랜서 PD로 활동하며 순우리말로 쓴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

“이번 책 제목이 《재미나는 우리말 도사리》지만, 사실 ‘도사리’의 뜻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그래서 지금 준비하는 시집은, 예를 들면 ‘도사리’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고 그 옆에다 도사리의 뜻을 설명하는 짤막한 글을 붙이는 식으로 준비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토박이말을 너무 모르니까 써 놓아도 무슨 뜻인지 모르면 문학작품의 기능을 못하지 않습니까. 그런 부분이 고민이죠.”

말은, 누군가 그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사라지고 말죠
 장승욱씨는 말이 생명체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늘 변화하는 게 당연하지만,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 없는 표현들이 판치는 건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러다가는 영어가 공용어가 되고 한국어가 제2의 언어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한다. 그래서 자신이 하는 작업들이 그런 흐름을 조금이나마 막는 힘이 됐으면 하는 것이 장승욱씨의 바람이다.

“예전에는 아무도 내음이란 말을 안 썼대요. 그런데 김영랑 시에서 처음으로 냄새를 내음이라고 쓰면서 모든 사람들이 아는 단어가 됐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이런 토박이말들이 사전에 있긴 하지만 누군가 불러주지 않으면 언젠가는 스르르 사라질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토박이말의 이름을 불러주기로 한 거죠. 그런 의미에서 제 작업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토박이말의 ‘출석 부르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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