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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사 | 칼럼/인터뷰

나는야 신명나는 아줌마 부흥사-전문MC 최광기

by 야옹서가 2003. 12. 1.
[2003. 12] 보통 대중매체를 통해 비쳐지는 사회자들은 연예인만큼이나 화려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시청자의 눈을 압도한다. 그러나 대중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거리공연에서 오히려 빛을 발하는 사람이 있다. 부와 명예 대신, 소외된 사람들이 보내는 희망을 먹고 달리는 그의 이름은 최광기(36) 씨다. 1993년부터 10년 넘게 시민운동 현장에서 활동해온 최광기 씨는 노동, 인권, 여성문제를 다룬 굵직굵직한 공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사회자로 유명하다. 2003년 12월, 제15회 인권콘서트가 열린 장충체육관 리허설장에서 아줌마의 저력을 한껏 발산하는 사회자 최광기 씨를 만났다.

소외된 곳 비추는 ‘진짜 아줌마’의 빛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에서 지난해 이름을 변경한 인권콘서트의 초대손님은 매년 조금씩 바뀌지만, 사회자 자리에 선명하게 찍힌 최광기 씨의 이름은 8년 째 붙박이였다. 공연장에서 그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두 번 놀란다. 처음엔 이름만 보고 남자인 줄 알았다가 여자라서 놀라고, 두 번째로는 평범한 아줌마처럼 보이는 그가 무대에 서기만 하면 열정적으로 무대를 장악하기 때문이다. 제13회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공연’에선 진행에 열중하다 2m 아래 무대바닥으로 떨어져 팔이 부러졌는데도 벌떡 일어나 사회를 봤고, 공연이 무사히 끝난 뒤에야 병원으로 실려 갈 정도였다. 무대 위에만 서면 최광기 씨는 시인이 되고, 가수가 되고, 내레이터가 된다. 평소에는 약간 굵은 듯한 목소리지만, 마이크만 잡으면 딴 사람처럼 청명한 목소리로 바뀐다.

“저마다 하나씩 복은 있나 봐요. 인물이 안 되니까, 목소리라도 되고…. 요즘은 사람들이 자꾸 ‘여자 김제동’이라고 한다니까요.”

평범한 외모 때문에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김제동 씨 역시 순박한 시골청년 같은 외모를 지녔지만, 대학축제에서 전문사회자로 특유의 입담을 발휘하며 방송으로 진출해 성공한 케이스다. 하지만 김제동 씨가 사람들에게 웃음을 준다면, 최광기 씨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 그가 스포트라이트 눈부신 방송국 대신 거리로 나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어렸을 땐 왕영은이 진행하는 ‘젊음의 행진’을 보며 방송진행자를 꿈꿨다는 최광기 씨. 그러나 대학에 입학한 후 1991년부터 상계어머니학교를 운영하게 되면서 소외된 사람들의 현실에 눈떴다. 22살, 한참 하고 싶은 일이 많을 나이에 최광기 씨는 화려한 방송인의 꿈을 접었다. 대신 어머니학교에서 문맹인 주부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아이들의 공부방도 열었다.

그러던 그에게 또 다른 방식으로 꿈을 이룰 기회가 왔다. 1993년 열린 빈민문화제에서 사회자로 발탁된 것. 그를 눈여겨본 민예총 박인배 씨의 추천으로 민주노총 창립 무렵에도 사회를 봤다. 시쳇말로 눈 뜨고 일어나니 그 바닥에선 유명한 사회자가 됐단다. 이번에 진행을 맡은 인권콘서트를 비롯해 안티 미스코리아, 월경페스티벌, 장애인 이동권 연대, 퀴어문화제 등에서 그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자리에 서 있든 그가 잊지 않는 건 '아줌마 마음'이다. 1991년부터 2001년까지 어머니학교를 운영하며 가난하고 힘겨운 삶을 유지해가는 아줌마들과 부대끼면서 그는 이미 22살에 마음도 체형도 ‘진짜 아줌마’로 거듭났다. 특히 아이를 낳은 후로는 주로 여성운동계 쪽에서 최광기 씨를 자주 찾는데, 그 자신도 남규(5), 예서(3)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고 보니 자연스레 평범한 여성들의 삶에 대해 할 말이 많아진단다.

평범한 사람들의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사실 방송에서는 완벽하고 훌륭한, 잘난 사람들만 나오잖아요. 그런 상황에서 저 같은 사람이 사회자로 활동한다는 사실 자체가 희망의 증거가 될 수도 있겠다 싶죠. 평범한 사람들이 제 몫을 다하면서 우리 얘기를 대변해줄 때 더 유쾌한 것처럼, 저도 대중매체에서 천박하게 폄하된 아줌마 상을 벗어나서, 좀 더 건강한 아줌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무슨 사회운동이나 이론으로 접근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억척스럽게 변할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현실을 조명하는 아줌마 부흥사가 됐으면 해요.”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생활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엄마 나이 마흔쯤 되면 아이들도 스스로 앞가림을 할 수 있을 테고, 자신에게도 또 다른 전기가 열리지 않을까 기대한다는 최광기 씨. 아이들에게도 엄마가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을, 나 혼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서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단다.

“제 아이들이 영어나 한글을 더 잘했으면 하는 바람은 없어요. 대신 편견이나 차별 없이 세상을 보는 따뜻한 눈을 가지길 바라죠. 장애인이라고 해서 이상한 눈으로 흘깃 보거나, 한국보다 소득이 낮은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무시하지 않고 똑같이 따뜻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사는 아이들이 바보로 취급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제가 일하는지 몰라요. 내 아이만 바보 되면 곤란하잖아요. 이런 점에선 저도 좋은 엄마 같지 않아요? 하하하하하.”

속사포처럼 터지는 호탕한 웃음이 시원시원하다. 공연 준비를 위해 자리를 일어서는 그의 서른여섯해 끝자락은 무대 위에서 더욱 빛났다. 2004년 상반기에 최광기 씨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꼭 한번 열고 싶다는 ‘광기 쇼쇼쇼’를 볼 수 있는 날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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