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취재기사 | 칼럼/인터뷰

엄마 마음으로 빚은 한국의 얼굴-닥종이 조형작가 김영희

by 야옹서가 2004. 1. 1.
[2004. 1월] 한지를 한 겹 두 겹 붙여 만든 통통한 몸, 둥글둥글 수더분한 얼굴, 꿈꾸는 듯 살포시 감은 실눈…. 닥종이 조형작가 김영희(60) 씨가 만든 인형은 하나같이 초승달을 닮은 한국인의 눈매를 가졌다. 누구나 바라보면 가느다란 눈웃음을 짓게 되는 그 얼굴은, 마음 깊이 간직한 동심의 다른 모습이다. 이처럼 한국적인 닥종이 인형으로 친숙한 재독작가 김영희 씨가 어느덧 환갑을 맞아 고국을 찾았다. 그동안 새롭게 만든 인형뿐 아니라 창작동화집 『사과나무 꿈나들이』(샘터)도 함께 들고서.

자연의 빛깔 담은 정겨운 인형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갤러리현대에서 만난 김영희 씨는 예의 결 고운 단발머리에, 검은 아이라인이 선명한 특유의 눈매 그대로였다.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날렵한 그의 모습에서 예순이란 나이를 실감하긴 어려웠다. 작품에서 감도는 젊은 기운이 육신의 노화까지 잠시 붙들어 놓은 것일까.

그의 닥종이 인형들을 보노라면 색이란 게 이처럼 아름다운 것이었나,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 색은 붓질 한번으로 솟아나는 게 아니다. 유년 시절, 자연 속에 뛰놀며 마음속에 새겨둔 색이 한지에 층층이 스며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김영희 씨는 그렇게 추출한 빛깔을 입힌 한지를 차곡차곡 다져 형상을 빚어낸다. 무생물에 지나지 않았던 인형은 그에게서 마음을 얻어 하나의 생명이 된다.

“아버지 성화로 네 살 때 학교에 갔어요. 신동 소리를 들어도 기쁘지 않았는데, 6.25사변 때문에 학교를 쉬고 마음대로 놀러 다니면서 너무 행복했어요. 노을이 새빨갛게 떨어지는 어스름 녘에, 얻어온 모사떡을 들고 시골 아이들과 함께 집에 오던 기억…. 그 빛깔, 그 환상이 없었으면 절대 이런 작품이 안 나와요. 그건 글로도 표현이 안돼요.”

성적보다 중요한 건 인간교육
노을은 고사하고 파란 하늘 한번 보기도 어려울 만큼 바쁘게 사는 게 요즘 아이들이다. 그러나 김영희 씨는 조기교육에 열을 올리기보다, 아이들이 자연의 숨길을 한 번 더 느끼도록 권했다. 주입식 교육만 받고 성적 올리기에 급급하며 자란 아이들이 커서 행복할 수 있겠느냐며, 도덕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먼 이국땅에서 터울 많은 다섯 아이들을 남부럽지 않게 길러낸 그는 육아에 대한 생각도 남달랐다. 성적이 나쁜 건 절대 야단치지 않았지만, 거짓말을 하거나 남을 무시하면 밥도 안 줄 만큼 큰 꾸중을 했다. 그에게선 아이를 검소하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키우는 독일식 육아방식과, 동방예의지국의 전통을 존중하는 옛날 한국 엄마의 모습이 둘 다 보였다. 그런 신념으로 올곧게 키운 그의 자녀들은, 아직 대학생인 넷째 봄누리와 이제 열다섯 살인 막내 프란츠를 제외하면 모두 당당한 사회인이 됐다. 자기만의 몰입에 시간을 쏟아 붓는 일이 누구보다 절실하게 필요한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다섯 엄마로 살아온 삶, 희생은 없었을까? 그러나 김영희 씨의 대답은 단호했다.

엄마에게 필요한 건 혼자만의 시간
“자식을 위해서 자기 삶을 희생한다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아무도 대신해줄 수 없잖아요? 희생이 필요한 삶 자체가 벌써 뭔가 잘못된 거예요. 노후대책도 미리 해놓고, 내가 희생했으니 커서 자식에 의지해야겠다는 생각도 말고 힘차게 자기 일을 찾아서 해야지.”

김영희 씨는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로 혼자만의 시간을 꼽았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번잡한 세상사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말도 통하지 않는 터키로 훌쩍 떠나 혼자 6개월을 보낸 적도 있다. 그의 최근작품들은 모두 고요한 침묵의 시간 속에서 태어난다. 혼자만의 시간이 소중함은 비단 예술가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상기된 얼굴로 다음 작품 계획을 이야기하는 그를 보며, 엄마들에게도 끊임없는 자기실현의 욕구를 길어 올릴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단순히 명품의류나 보톡스 수술로 되찾을 수 없는 내면의 젊음이, 그 안에 모두 숨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