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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사 | 칼럼/인터뷰

인생은 행복을 찾아가는 무대-뮤지컬 배우 최정원

by 야옹서가 2004. 4. 1.
[2004. 4]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아이보다 소중한 존재는 없다. 하지만 자상한 엄마, 속 깊은 아내, 유능한 직장인 등 여성에게 1인 다역을 요구하는 현실 속에선, 아이의 존재가 엄마의 앞길을 막는 족쇄처럼 여겨질 때도 있는 법이다. 산울림소극장 개관 19주년 기념작인 ‘딸에게 보내는 편지’ 역시 이런 갈등의 순간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이 연극은 뮤지컬 스타 최정원(35)이 연기생활 17년 만에 첫 도전한 모노드라마라는 점에서도 화제가 됐다. 연기자의 초심으로 돌아가 소극장 무대에 홀로 선 최정원 씨를 산울림소극장에서 만났다.

자아실현 꿈꾸는 엄마의 고백록
‘딸에게 보내는 편지’는, 엄마로서의 삶보다 자아실현에 충실했던 열정적인 가수 멜라니가 곧 사춘기에 접어들 열한 살짜리 딸에게 소홀했던 과거를 참회하며 삶의 자세를 조언하는 내용을 담았다. 배우의 역량에 따라 성공이 좌우되는 모노드라마에서 자칫 실수라도 했다간 뮤지컬 배우로 쌓은 명성을 고스란히 잃을 수도 있는 모험이었지만, 최정원 씨는 과감히 이 연극을 선택했다. 자신과 똑같은 나이의 배역이란 점도 운명처럼 다가왔지만, 무엇보다 일하며 딸을 키웠던 엄마로서의 진한 공감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공연이 끝나면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요. 연기가 아니라, 제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가 되죠. 극중에서 아이가 여섯 살 무렵일 때의 이야기가 중심인데, 저 역시 여섯 살배기 딸이 있거든요. 이 작품이 제겐 인생의 큰 전환점으로 기억될 것 같아요.”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그의 역동적인 모습만 기억하는 관객들에게 ‘모노드라마 배우 최정원’의 모습은 자칫 단조롭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작은 무대의 장점을 살려 관객과 교감하며 감정의 흐름을 공유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노련한 배우의 모습이 묻어났다. 특히 가수라는 극중 배역에 맞춰, 극 속에 등장하는 다섯 곡의 노래도 직접 선곡하고 불렀다. ‘여자이니까’ ‘어머님의 자장가’ ‘당신만을 사랑해’ ‘사랑스런 그대’ 같은 가요부터 뮤지컬 ‘캣츠’의 삽입곡 ‘메모리’까지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메모리’는 최정원 씨와 그의 딸 수아(6)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노래다. 평소 태교음악 대신 즐겨듣기도 했지만, 수중분만으로 낳은 수아가 태어나던 순간 병실에서 들었던 노래였기 때문.

최정원 씨에게 딸의 탄생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임신 초기에 하혈하면서 유산된 줄 알았던 아이가 살아있음을 뒤늦게 알았고, 그때부터 임신과 출산문화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가 원하는 분만은 남편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축복 속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었다. 하지만, 임신부를 환자인양 취급하는 일반 병원에서는 그런 분만환경이 불가능했다. 어렸을 때도 거의 약을 먹지 않고 자랐고, 감기에 걸려도 ‘땀 빼고 운동하면 낫는다’ 생각했던 그는, 분만촉진제를 맞거나 제왕절개수술을 권장하는 병원의 출산문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수중분만 경험하며 인권분만 전파해
결국 평소에 물을 좋아했던 자신과 가장 잘 맞는 분만법을 찾아낸 것이 수중분만이었다. 최정원 씨는 그런 자신의 출산과정을 2000년 SBS 특별기획 ‘생명의 기적’ 프로그램에 낱낱이 공개했다. 배우로서의 신비감을 유지하고 여자로서 예쁘게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엄마와 아이의 인권을 존중하는 대안분만의 한 사례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렵사리 낳은 딸이 지금은 여섯 살, 한참 유치원을 다니면서 재롱부릴 나이가 됐다. 아이를 낳은 지 6개월 만에 뮤지컬 무대에 복귀했던 그는, 한때 아이를 향한 죄책감에 힘들기도 했단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못된 엄마’란 소릴 들을지도 모르지만 집안에 무슨 일이 있어도, 심지어 아이가 아파도, 일단 공연장에 들어선 그 순간만큼은 ‘누구의 엄마도, 아내도 아닌 ‘배우 최정원’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얘 때문에 내가 일을 쉬어야 하는 거야’ 하면서 원망할 때보다, 제가 꿈꾸는 일들을 하면서 아이에 대한 사랑이 더 커지죠. ‘내가 너 때문에 내 인생을 포기했으니까 너는 이런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기 인생을 선택하도록 조언만 해주는 엄마가 되길 바라고요. 지금도 수아가 어떤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어요. 다만 남에게 베풀 줄 아는 아이가 됐으면 좋겠어요.”

최정원 씨는 수아를 가지면서 바쁜 일상 속에서도 틈틈이 육아일기를 썼다. 지금껏 누군가의 딸로 살다가,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사실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는 놀라운 경험이었고, 그렇기에 지금도 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생각나면 틈틈이 기록한다. 메모지가 없으면 핸드폰으로 자기 자신에게 문자를 보내서라도 잊지 않도록 매 순간을 기록한다.
그렇게 특별했던 엄마로서의 경험을 오롯이 실어낸 덕분일까, 연극무대 신고식인 이번 공연의 반응도 뜨겁다. 각계의 반응이 좋아 5월 9일까지 연장공연이 잡혔다며 서글서글한 웃음을 짓는 최정원 씨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 보인다.

“그동안 해온 공연은 제게 자식과 같아요. 6개월이고 1년이고 오랜 시간을 투자해 만들어낸 생명이거든요. 어쩔 때는 바보 같고, 어쩔 때는 섹시하고, 때론 귀엽기도 하고. 그런 모습들이 늘 좀 아쉽고 섭섭하면서도 모두 사랑스러워요.”

최정원 씨는 언젠가 ‘최고의 작품’을 완성하면, 멋있게 무대를 떠나고 싶다고 고백했다. 예전에는 그 순간이 빨리 오지 않길 바랐지만, 이젠 죽기 전에 꼭 한번은 그 순간과 마주하고 싶단다. 늘 부족한 자신을 느끼기에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는 그는, 채워지지 않는 무엇을 바라보며 오늘도 무대 위에 서 있다. 그가 바라는 최고의 작품이란 꼭 무대 위에서만 찾을 수 있는 건 아닌 듯하다. “배우를 하든, 한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든,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다면 그게 바로 진정한 무대일 거예요”라던 그의 말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유용한 조언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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