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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사 | 칼럼/인터뷰

지상의 몸 위에 가는 선 하나-발레리나 김주원

by 야옹서가 2007. 9. 3.

[문화와 나/ 2007 여름호] 단원들이 모두 떠난 연습실은 적막했다. 누군가 벗어두고 간 토슈즈 한 켤레만 텅 빈 연습실을 지켰다. 동그란 토슈즈 끝은 고작 3cm쯤 될까? 발레리나 김주원(29)은 그 3cm의 지구 위에 몸을 곧게 세우고 춤을 춘다. 발꿈치를 들어 톡, 토슈즈 끝으로 서는 동작은 일견 단순하지만, 이는 김주원이 자신의 몸에 봉인했던 수많은 자아 중 하나를 지금 곧 해방시킬 것이라는 신호다. 마침내 신중히 골라낸 캐릭터를 얇고 가녀린 육체에 덧입는 순간, 김주원은 사라지고 ‘배역 속의 그녀’만 남는다.

죽어서도 연인을 지키려는 지고지순한 지젤, 남자를 농락하는 농염한 여인 카르멘, 운명과 싸우는 스파르타쿠스의 아내 프리기아…. 1998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해적>의 여주인공 메도라 역으로 데뷔한 이래, 김주원이 연기한 여성상은 시간과 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든다. 데뷔 10주년이 되는 해인 2007년에는, 그의 무대 인생 중 처음으로 한국 무용에도 도전했다. 지난 2월에 열린 안무가 국수호의 창작 무용극 <思悼-사도세자 이야기>에서 혜경궁 홍씨 역할을 맡은 것이다. 현대 무용가, 한국 무용가, 발레리나 등 서로 다른 영역에서 활동해온 예술가들이 장르를 초월해 열연한 이 공연에서, 그는 토슈즈를 벗고 맨발로 춤을 췄다. 익숙한 발레의 움직임에 한국적인 색채를 덧입혀 새로운 인물을 창출해낸 것이다.

“무대에 서면 표정 하나, 손짓 하나에도 제 생각과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나온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늘 새로운 배움이 중요한데, 정작 한국 춤에 대한 경험은 부족했죠. 무대에서 한국적인 색채를 몸으로 표현하는 느낌을 꼭 경험해 보고 싶었어요.” 

서정성으로 승화시킨 한(恨)의 정서 
1992년 러시아 볼쇼이 발레학교에 입학해 6년간 해외 생활을 했고, 1998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한 후에는 발레에만 몰두했던 그이기에, 한국 무용에 도전했던 이번 공연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특히 지아비와 생이별하는 여인의 처절한 슬픔을 무언극처럼 풀어내면서, 비로소 ‘한(恨)’의 정서를 오롯이 이끌어낼 수 있었기에 무엇보다 뜻 깊다. 김주원은 이 공연에서, 한국 고유의 정서를 자신의 내면으로 체화하는 일에 천착한 듯하다.

이는 단순히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낡은 명제를 답습한 것이 아니다. 2006년 4월, 그가 발레 계의 아카데미상이라고 불리는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 최고 여성무용수로 선정되었을 때, 김주원을 높이 평가한 사람들 역시 그의 춤사위에서 묻어나는 한국적 서정성에 높은 점수를 줬다. 

“한이라는 정서에는 한국인만이 지닌 무척 독특한 색깔이 배어 있어요. 외국 사람들은 제 춤을 가리켜 ‘대단히 서정적이고, 섬세하고, 깊은 느낌이 묻어 있다’라고 말하지만, 그 역시 제가 한국 사람이기에 그런 인상을 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김주원은 서구인 중심의 발레 무대에서 태생적으로 도드라질 수밖에 없는 동양인으로서의 핸디캡을 장점으로 승화시킨다. 이는 엄격한 훈련을 거쳐 신체적인 악조건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생히 드러난다. ‘가장 아름다운 상체 라인을 지닌 발레리나’라는 찬사를 받는 그이지만, 이 역시 타고난 것이 아니다. 매일 아침 9시 반부터 12시간 가까이 반복되는 연습으로 만들어진 몸이다. 흔히 ‘뼈를 깎는 고통’이란 말을 하지만, 발레리나에게는 ‘뼈와 근육의 모양을 바꾸는 고통’인 셈이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이런 과정을 거쳐야만 무대에서 아름다워 보이는 몸의 라인을 만들고 또 유지할 수 있다.

혹독한 연습으로 만든 ‘가장 아름다운 상체 라인’ 
“일반적인 사람의 기준에서 보면 비정상적으로 보여도, 무대에서 예뻐 보이는 몸의 라인이 있어요. 무릎이 많이 들어가고, 발등의 아치가 높고….하지만 전 그런 신체 조건을 타고나지 못했어요. 기형적으로 뒷목 뼈가 튀어나오고, 목도 너무 길고, 팔꿈치와 어깨뼈가 도드라져서 각이 져 보이거든요.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연습을 거듭한 덕분에 그런 결점도 오히려 아름답게 보인다니 감사할 뿐이에요.” 

김주원에게는 휴가라는 단어가 없다. 근육 끝까지 섬세한 움직임이 전달되어야 하는데, 유난히 뻣뻣한 근육 탓에 하루만 쉬어도 다음 날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휴가 기간이 주어져도, 그동안 연습하느라 제대로 못 받은 물리치료를 꼼꼼하게 받고 혼자 연습실에서 여유 있게 연습하는 데 쓴다. 그렇듯 고된 노력 끝에 만들어진 그의 몸은 얇고 가늘고 섬세하다. 유난히 긴 목 아래 도드라진 쇄골이 목걸이처럼 빛나고, 쇄골에서 어깨뼈로, 다시 팔꿈치에서 팔목으로 이어지는 몸의 굴곡은 봄 언덕처럼 부드럽다. 잔머리가 흘러내리지 않게 듬성듬성 실핀을 꽂고, 색 고무줄로 아무렇게나 동여맨 머리카락도, 마치 고운 비녀로 쪽진 것 같은 단아함이 배어난다.

이런 경험이 있기에, 그는 발레리나가 타고난 재능보다 체계적인 연습과 시의적절한 훈련으로 완성되는 존재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렇기에 한국에 제대로 된 발레학교 하나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한국에서 발레를 하려면, 예중과 예고를 거쳐 대학을 졸업해야 비로소 발레단에 입단하게 된다. 이런 천편일률적인 과정을 답습해서는, 프로 무용수를 육성하는 교육을 제때 받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발레가 제대로 자리 잡으려면, 발레단 산하에 발레학교가 있어야 한다”고 그가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이 땅의 발레를 위하여
“무용수로서 왕성한 에너지와 기량을 갈고 닦아나가야 할 시기가 18세, 19세 무렵이거든요. 그런데 프로 무용수 한 명이 만들어지는 9, 10년의 기간 동안 필요한 체계적인 교육 제도가 한국에는 없어요. 그래서 심지어 발레단에 들어와서도 똑같은 스타일의 춤만 익히다가 무용수로서의 인생이 끝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면에서 보면 저는 운이 좋았죠. 그 시기에 볼쇼이 발레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으니까요.”

1년에 100회 이상 무대에 서는 국립발레단 무용수로 활동해온 지난 10년 간 매너리즘에 빠질 때도 있었고, 해외 진출 권유도 종종 받았다. 하지만 한국 사람으로 태어나 고국의 관객과 교감하는 무대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그는 선뜻 고국을 떠날 수 없다. 오늘의 ‘발레리나 김주원’이 있게끔 해준 사람들이 바로 한국 각지에 숨은 발레 애호가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주원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해외 무대에 서기보다, 우리 땅 곳곳에 숨은 발레 팬을 찾아 떠나는 국내 공연을 더 소중히 여긴다. 공연 문화의 오지인 해남 땅끝마을에서 열리는 공연도 마다하지 않는다. 지난 5월 여수시민회관에서 열린 국립발레단의 대중 발레 프로그램 ‘해설이 있는 발레’에 공연자 아닌 진행자로 나선 것도, 일반 대중 속으로 스며드는 공연을 지향하고 싶은 소박한 꿈이 담겨 있다.

김주원은 연습실과 집, 공연장을 단조롭게 오가는 생활 속에서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새로운 자극을 일상 속에서 찾는다. 부상과 바쁜 공연 일정 탓에 휴학했던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도 올해 복학했다. 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어린 후배들과 동기생이 되어 공부하지만, 늦깎이 학생의 삶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쉬지 않는 배움이 자신을 키운다고 믿는다.

“사람들이 저보고 ‘호기심 천국’이라고 그러는데요, 궁금한 건 꼭 알아야 되고, 모르는 건 부끄러워하지 않고 잘 물어보거든요. 영화나 책 보는 것, 음악 듣는 것도 좋아하고…. 제 춤을 만들어가는 과정도 뭔가 대단하고 투자하고 배워서 얻는 게 아니라, 제가 바라보는 것들 생각하는 것들, 또 말하는 것 하나하나…그런 일상 속에서 얻어지는 것 같아요.

프로 데뷔 10주년을 축하하는 주변 사람들의 인사에도, 김주원은 “지금껏 춤추며 살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 10주년이라는 햇수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어떤 역할을 맡았을 때도 무대에서 관객들과 호흡하며 춤추는 시간 자체가 모두 자신에게 성장의 동력이 되어 주었기에, 10년의 세월 동안 맡았던 배역 중 특별히 애착이 가는 역할을 꼽기도 어렵단다. 제 열 손가락을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듯이 말이다.

하지만 가장 좋아하는 배역이나, 삶의 전환점이 된 무대를 꼭 짚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무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그에게도 역할 모델이 되어준 사람은 있다. 1960~70년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발레리나, 나탈리아 마카로바다.

그림자에도 표정을 담는 프리마돈나  
“나탈리아 마카로바는 태생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무용수지만, 그 이전에 손가락의 아주 작은 움직임 하나, 눈빛 하나까지도 자기만의 의미를 만들어 내고, 거기에 영혼까지 불어넣은 듯한 느낌이에요. 그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제게는 모두 감동이었어요.”
평소 무대에서는 근육의 움직임 하나, 숨쉬는 동작 하나도 의미가 없으면 하지 않는다고 천명했던 그였기에, 마카로바의 공연에 깊이 공감하는 이유를 알 듯했다. 두 발을 곧추세우고 손가락을 살포시 하늘로 들어 올린 그의 모습을 다시 바라본다. 저 손끝은 어떤 단어를 몸짓으로 바꾼 것일까. 불상의 수인(手印)처럼 수많은 언어를 담은 손을 하늘로 향한 채, 그가 어둠 속에 서 있다. 무심한 손끝의 움직임, 어둠 속으로 흐려지는 그림자 속에도 표정이 있음을, 김주원의 춤 속에서 다시 본다.

김주원 | 1978년 부산 출생. 1992년 러시아 볼쇼이 발레학교로 유학을 떠나 6년간의 교육 과정을 마치고 1998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했다. 같은 해 <해적>의 메도라 역으로 국립발레단 최연소 주역을 따냈다. 한국발레협회상(2000)을 비롯해 러시아 모스크바 국제발레콩쿠르 동상(2001), 문화부장관상(2002), 한국발레협회상 프리마 발레리나상(2002), 제36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4), 제14회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 여성무용수상(2006년)을 수상했다. 현재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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