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에서 밤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밤은 노래한다》를 읽었다. 소음을 지워줄 3M 귀마개를 손가락 끝으로 돌돌 말아 귓구멍에 쑤셔 넣고, 켜나마나한 노란 불빛이 흘러나오는 보조등을 켜고서. 객차 안의 불빛은 어두웠고, 창밖도 어두웠고, 내 마음도 어두웠다. 밤의 노래에 몰입할 조건은 충분히 갖춰진 셈이다. 덜컹거리는 기차는 타임머신처럼 시간을 서서히 거슬러 올라, 1930년대 만주의 어둠 속에 나를 내려놓는다. 


《밤은 노래한다》는 1930년대 만주에서 실제로 일어난 이른바 ‘민생단 사건’을 토대로 한 소설이다. 500여 명에 달하는 혁명가들이, 서로를 처단해야 할 민생단이라 주장하며 살해했던 비극적인 사건. 한데 역사소설의 외피를 입고 있으나 내겐 이 책이 연애소설로 읽혔다. 연애라고는 하나, 그 사랑은 달콤한 솜사탕 같은 맛이 아니다. 이 사랑은 쓰고 독하다. 쇳가루처럼 스산한 피 냄새가 난다. 제대로 시작되지도 못한 사랑은 예고 없이 종결되며, 바로 그 연애의 끝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여자(이정희)를 사랑한다고 믿었고, 그녀가 반지를 받은 것으로 사랑이 성립되었다 믿은 남자(김해연)에게, 여자의 갑작스런 자살 후 밝혀진 진실은 가혹했다. 매력과 재능을 겸비한 여학교 음악선생인 줄로만 믿었던 이정희는, 목적 달성에 도움을 줄 남자들을 포섭하는 ‘공산당원 안나 리’로 정체가 밝혀진다. 과연 이 여자는 나를 사랑했는가, 내가 사랑한 여자는 누구였는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김해연은 혼란에 빠진다.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계가 그처럼 간단하게 무너져 내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건 이 세계가 낮과 밤, 빛과 어둠, 진실과 거짓, 고귀함과 하찮음 등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나는 몰랐기 때문이다.”


김해연은 조선인이면서도 자신이 일제 강점기에 ‘만철’(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측량기수로 일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낄 뿐, 주권 잃은 나라에 대한 비애라곤 모른 채 살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이정희의 죽음을 계기로 그의 삶은 크게 변화한다. 일본군 중위 나카지마가 “사랑은 네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거야”라고 예고했듯이. 충격 때문에 마약중독자가 되고, 자살을 기도하는가하면 실어증까지 앓던 김해연이, 이정희처럼 공산당원이 되고 조선 혁명을 위해 싸운 것은, 이정희가 밟았던 길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그녀의 진실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해연이 우여곡절 끝에 속한 그들의 집단 역시 명료한 진실이 부재하기란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 혁명을 완수해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 중국 공산당에 가입해 조선이 아닌 중국을 위해 싸워야 했던 사람들. 그런 아이러니를 견딜 수 없어 조선 혁명을 주장하다 민생단으로 몰려 죽어간 사람들이 있었다. 이처럼 극한 상황에서는 내가 죽던가, 남이 죽던가 둘 중의 하나다. 누군가 먼저 “저놈이 민생단이다!”하고 외치며 총알 한 방을 머리에 먹이면 판결은 끝난다. 이런 상황에서 진실이 무엇인가는 중요치 않다. 오직 살아남은 사람이 진실이 될 뿐이다.

그러나 내가 죽지 않기 위해 상대를 '민생단'으로 몰아 죽이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김해연이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은 또다른 여자, 여옥이를 통해서였다. 야생소녀처럼 활달하며 혁명정신에 투철한 여옥이는 죽음의 세계에 가까웠던 김해연을 현실로 이끌어내 삶의 목표를 찾게끔 한다. 아마도 김해연이 마지막에 최도식을 살해함으로써 복수하지 않은 것은, 그가 이미 여옥이를 통해 구원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김해연의 사랑을 부정했던 것처럼 보이는 이정희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이정희는 일본 제국주의 치하 사회에서 껍데기처럼 살아갈 뿐이었던 김해연의 정신을 한번 죽임으로써, 그가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계기를 제공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정희가 김해연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책 속의 주인공들이 내게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은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물음이다. 진실 없는 세상에서 누가 우리를 구원해줄 것인가. 작가가 던지는 해답은 하나다. ‘사랑이 모든 것을 구원한다’. 

*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으로 표지를 빼놓을 수 없다.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에 집착했던 에곤 실레의 드로잉이,
  혁명가들의 이야기와 어울리는 붉은색 표지에 살포시 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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