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고양이 1] 인간과 동물 사이, 몽환적인 인형들-인형작가 이재연

 

인형작가 이재연의 작품은 인간과 동물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환상동화 속에서 걸어나온 듯한 그 인형에는, 낯설지만 묘한 매력이 있다. 경계를 의식하지 않는 존재들이 늘 그렇듯,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어디로든 스스럼없이 스며든다. 기묘하고 매혹적인 판타지를 인형으로 빚어내는 작가 이재연을 만났다. 

 
이재연의 일산 작업실 입구는 피규어로 쌓은 성벽 같다. 어두운 지하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유리관처럼 투명한 상자에 담긴 피규어들이 벽을 따라 빼곡히 들어찼다. 그의 작업실이 피규어 쇼핑몰의 창고도 겸한 까닭이다.

피규어 성벽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가니, 그제야 작업공간이 보인다. 컴퓨터 2대와 작업책상, 인형 옷을 만들 때 쓰는 미싱, 각종 공구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지하실이라 볕은 들지 않지만, 대신 한쪽 벽 전체를 푸른색으로 칠해 하늘빛을 실내로 들였다.


처음부터 인형작가를 꿈꾼 건 아니었다. 웹디자이너로 일하다 개인 작업을 하고 싶어 회사를 그만뒀고, 온라인 피규어 쇼핑몰을 차렸다. 그러면서 피규어를 팔기만 할 게 아니라 직접 만들어보고 싶었다. 피규어를 배울 곳이 마땅치 않아, 차선책으로 선택한 곳이 인형교실이었다.  2003년 겨울, 한국 구체관절인형작가 1세대인 정양희 인형교실을 찾아가 구체관절인형과 비스크 인형 제작법을 배웠다. 그때 만난 동기들은 지금까지도 단체전이나 기획전을 통해 교류하면서 서로 힘이 되어준다.

보이지 않는 감정을 빚어 만든 인형들
“한번은 인사동에서 전시를 했는데, 조카가 ‘이모 인형은 너무 슬퍼요’ 그래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런 표정이 나오는 게 제 인형의 특징 같아요.” 

이재연
의 인형은, 귀여운 얼굴과 육감적인 몸매를 뽐내는 여느 상업인형들과 다르다그에게 인형은 예쁜 옷을 갈아입히며 노는 물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감정을 담는 그릇에 가깝다. 인형을 만들 때면, 텅 빈 웃음만 짓는 인형에 결핍된 어떤 감정을 형상화하고 싶었다. 의식 깊은 곳에서 억눌렸던 감정이, 미묘하게 비례가 비틀린 인형에 고스란히 담긴다. 작은 인형의 몸에 깃든 감정의 무게는 만만치 않다.

“처음에는 그런 감정을 형상화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는데, 요즘은 동물과 사람의 중간 단계를 묘사하는 데 마음이 끌려요. 이를테면 앞에서 볼 땐 토끼 머리통이었는데 뒤를 보면 사람 얼굴이 있다던가, 얼굴은 고양이인데 몸은 사람이던가 하는 식이죠.

 이재연은 단순히 그로테스크한 면을 강조한 반인반수보다, 판타지를 가미해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데 흥미를 느낀다. 그런 인형 중에 《거울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붉은 여왕’을 재해석한 작품이 있다. 책에 수록된 원화도 아름답긴 하지만, 그저 원화를 입체로 재현하기만 하는 건 지루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약간 변화를 준 캐릭터가 조깅복을 입은 붉은 여왕이다. 탄탄한 근육, 날렵한 손날, 인간과 고양잇과 동물이 기묘하게 뒤섞인 듯한 얼굴은 마치 실제 고양이가 육상선수로 변신한 것처럼 보인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은 내내 달리기만 하는데, 그것도 특이하게 뒤로만 달려요. 그리고 앨리스가 꿈에서 깰 때, 붉은 여왕은 고양이로 변하게 되죠. 그런 설정이 흥미로워서 조깅복을 입고 운동화를 신은 여왕으로 만들었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왜 쟤가 여왕이냐고 물어요. 보통 여왕은 드레스를 입고 왕관을 쓴 모습으로 표현되니까 낯설었던 거죠.



이렇게 고양이를 모델로 한 인형에 생기를 불어넣는 건, 함께 사는 고양이들이다. 러시안블루 피비와 조이, 그리고 인형공방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발견해 키운 새끼고양이 모니카, 이렇게 세 마리가 항상 작업실에 함께 한다. 한동안 즐겨 보았던 미국 시트콤 <프렌즈>의 주인공들 이름인데, 모두 여섯 명이라 남은 이름 세 개는 집 근처로 밥 얻어먹으러 오는 길고양이들에게 붙여줬단다.

 
분명 고양이가 세 마리라고 들었는데, 보이는 건 피비 뿐이다. 둘째 조이와 막내 모니카는 겁이 많아서, 낯선 사람을 보면 무작정 숨기부터 한다고 했다. 간식 캔 따는 소리로 유인해도, 모니카는 커튼 사이로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 얼른 숨기만 할 뿐이다. 신경이 예민한 조이는 잠시 안겨있나 싶다가, 뒷발로 힘껏 밀치면서 뛰어내려 후다닥 달아난다. 얼마나 날쌘지 고양이가 아니라 새끼표범 같다. 유독 낯가림이 심해 평소에는 모습을 잘 볼 수 없는 ‘투명 고양이’들이 있다는데, 피비와 모니카도 그런 모양이다.


동생들이 숨거나 말거나, 피비는 개의치 않고 모니터 위로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 앉는다. 높고, 넓고, 따뜻해서 피비가 제일 좋아하는 자리다. 사람을 가장 잘 따르는 피비는 잘 때도 사람 곁에 다가와 팔베개를 하고 잔다. 그러니 첫째인 데다가 유달리 살가운 피비에게 애착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세 마리 고양이를 모델로 삼아 스탬프도 만들었다. 이재연은 인형을 주문한 사람들에게 직접 헝겊가방을 만들어 보내는데, 가방 표면에 이 스탬프를 찍어 보낸다. 그의 작업실에 머물면서 고양이의 매력을 전해준 피비, 조이, 모니카는 스탬프 도안으로 다시 태어나 이재연의 인형과 함께 낯선 곳을 여행한다.  


 “피비를 모델로 인형을 만들 때는 되도록 닮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러다 보니 너무 진짜 고양이처럼 되어버려서, 인형다운 맛이 사라졌죠. 피비 말고도 고양이 세 마리가 표정이 다르니까, 하나하나 다르게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은 있어요. 귀여운 포즈나 인상적인 상황, 표정…만들고 싶은 모습이야 너무 많죠.


이재연이 요즘 즐겨 만드는 건 비스크 인형이다. 석분점토로 만드는 구체관절인형과 달리, 비스크 인형은 일정 수량까지 복제가 가능하고, 같은 원형을 쓰더라도 채색과 의상을 달리하면 전혀 다른 느낌의 인형이 된다. 점토나 비스크 모두 재료의 장단점이 있지만, 자유로운 형태를 묘사해야할 때는 점토로 빚어 만들고, 비스크는 매끄럽고 고급스런 분위기를 내야할 때 쓴다.  

 

“비스크 인형에는 안구를 넣기도 하고 손으로 그려 넣기도 하는데, 안구를 넣으면 살아있는 것 같고 정교해 보이지만 차가운 느낌이 들죠. 저는 조각에도 그림처럼 작업하는 걸 선호하는 편이라, 안구를 그리는 쪽이 더 마음에 들어요.
 


고립된 채 작업에만 몰두하기 쉬운 인형작가에게 가장 어려운 건 작품을 알리고 안정적인 판로를 개척하는 일이다. 인형작가 커뮤니티숍 ‘판도라돌’(www.pandoradoll.com)을 운영하는 것도, 이런 상황에서 작은 돌파구나마 마련해보려는 시도 중 하나다. 판매되는 작품들은 위주여서 생계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인형을 팔아 큰돈을 벌기보다는 창작인형 분야를 대중에게 알리고 싶은 목적이 크다. 장기적으로는 인형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작가들이, 인터넷을 통해 교류하는 장이 되었으면 한단다. 이재연닷컴(www.leejaeyeon.com)에서도 그가 만든 동물 인형들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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