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포털 엔키노/2000. 10] 볼일이 있어서 인사동 쪽으로 나갔다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에 낡아빠진 육교가 서 있던 자리에, 빨간 카펫이며 황토색 바탕에 검은 얼룩무늬가 있는 천을 둘러쓴 녀석이 떡 버티고 서 있었으니 말이죠.

무늬 때문인지, 마치 거대한 호랑이 한 마리가 다리를 쩍 벌리고 네거리에 우뚝 서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처음엔 인사동도 ASEM회의 때문에 이렇게 변신한 건가? 하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설치미술가 홍현숙씨의 작품이더군요. (ASEM이랑은 아무 관계도 없었습니당.^^;)

형식면에서 보았을 때에는 거대한 천과 끈을 사용해서 공공건물이나 특정 지역을 말 그대로 포장해버리는 크리스토의 작업도 연상됐습니다만, 크리스토의 작업이 심플한 선물 같은 느낌이라면, 홍현숙의 작업에서는 동물적인 생동감이 느껴집니다. 호랑이 가죽무늬 천의 부드러운 촉감과 현란한 무늬 , 계단에 깔린 붉은 카펫에서 어렴풋이 그런 인상을 받을 수 있고, 작가노트를 읽어보면 그 느낌은 더욱 명확해지지요.

“…낡은 육교는 아름다웠다. 생로병사의 아름다움까지도 거기 있었다. 패인 시멘트와 녹슨 철근에서 마치 관절염 걸린 비명이 들리는 듯!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무게를 견뎌냈을까? 녹신녹신해진 계단과 난간과 기둥의 선. 그 선은 이미 직선이 아니다. 시간은 육교의 강한 직선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만들고 그 거대한 덩어리를 서서히 허물어 내리고 이내 먼지로 만들 것이다.

우리가 그 육교에 피부를 만들어 준다. 가장 동물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는 호랑이의 가죽을 빌려온다. 그래서 육교의 가쁜 호흡을 들려주고 싶다. 육교의 숨결에 귀기울이게 하고 싶은 거다.
환경과 생태에 대한 담론은 무성하다. 그러나 그 실천의 작은 걸음은 어쩐지 미루고만 있는 우리들. 돌아보라! 존재의 생생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의외로 많다.”

작가는 우리 주변에서 이미 존재를 감춰버린 호랑이를 서울 한복판에 되살려 환경문제에 접근한 듯 합니다. 아∼주제가 거대하기는 하지만, 일단 그 방식이 고답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한 가지 더 욕심을 부린다면, ‘통과한다’는 행위에 대한 비중이 좀 더 강했다면, 하는 거였습니다.

처음 이 전시의 계획서를 읽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이 어떤 터널의 형태였는데, 막상 전시를 보니 그냥 육교를 감싸는 식이더군요. 비닐하우스처럼 둥근 지붕을 올리고 천을 씌운 뒤에 그 속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었다면, 그리고 그 공간 안에서 뭔가 독특한 이벤트가 펼쳐졌더라면 작가와 관람자가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좀 더 커졌을 텐데……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작가의 의도와는 별 관계없지만, ‘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본 계기가 되기도 했어요. 나는 지금 공중에 난 길을 걷고 있다, 뭐 그런 느낌. ^-^

평소에는 그 존재를 느끼지 못하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 “아, 이런 게 있었구나” 하고 불현듯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경이로운 체험’이라고나 할까요. 공공장소에서 진행된 설치미술 인사동 육교 설치 프로젝트는 이런 발견의 즐거움을 제공합니다.

아쉽게도 이번 작업은 10월 31일까지만 전시되지만, 작업이 오랫동안 방치돼 훼손되거나 처음의 산뜻한 충격이 희미해지는 것보다는, 게릴라식으로 단기간 설치했다가 여운을 남기면서 사라지는 것도 멋있을 거란 생각을 해 봅니다.

* 호랑이로 변신했던 인사동의 낡은 육교는 이제 찾아가도 만날 수 없습니다.
육교가 헐리고 큰 횡단보도로 바뀐지 오래되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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