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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공주가 부르는 생명의 노래-시인 김선우 [문화와 나 | 2007년 가을호] “저는 버려짐으로써 사랑을 얻은 존재이니, 버려진 것들의 원과 혼을 이끄는 이가 되겠나이다.” 김선우 시인을 만나러 강원도 원주로 가는 길에, 그가 고쳐 쓴 전래 설화 바리공주의 한 대목을 되짚는다. 핏덩이 때 자신을 버린 아비에게 피로 복수하기는커녕, 그 아비 목숨을 구하고자 저승길 떠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여인, 바리공주가 시인의 몸속에 스며든다. 그의 넋을 입은 시인이 닫힌 입술을 천천히 연다. 생명을 낳고 거두는 모태신의 자궁처럼 아득히 벌어졌다 닫히는 입술로, 아프고 슬프고 괴로운 세상의 모든 혼을 위무하는 노래를 읊는다. 김선우는 2007년 7월 펴낸 세 번째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에서 피 흘리며 죽어간 망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가.. 2008. 9. 8.
두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영화감독 민병훈 영화감독에겐 예술영화라는 타이틀이 찬사인 동시에 낙인이다. 예술영화라면 손사래부터 치는 투자자, 개봉에 난색을 표하는 극장주, 보나마나 어렵고 지루할 거라며 관심도 갖지 않는 관객들을 떠안고 걷는 길은 멀고 험하다. 그러나 민병훈 감독은 현실을 달콤한 판타지로 포장해 팔아치우는 사기꾼보다, 우직한 싸움꾼이 되길 원한다. 영화의 절대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그의 고집은, 영화 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집요하고 무모한 삽질과 닮았다. 자신을 극한 상황까지 내몰 때조차, 삽 대신 카메라를 든 민병훈 감독의 ‘삽질’은 결코 무겁지 않다. “깃털처럼 가볍게, 머슴처럼 저돌적으로, 하지만 심각하진 않게.” 그가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픈 삶의 태도는 그러하다. 민병훈 감독이 러시아 국립영화대학 졸업 작품으로 만든 첫 장편.. 2008. 7. 13.
지상의 몸 위에 가는 선 하나-발레리나 김주원 [문화와 나/ 2007 여름호] 단원들이 모두 떠난 연습실은 적막했다. 누군가 벗어두고 간 토슈즈 한 켤레만 텅 빈 연습실을 지켰다. 동그란 토슈즈 끝은 고작 3cm쯤 될까? 발레리나 김주원(29)은 그 3cm의 지구 위에 몸을 곧게 세우고 춤을 춘다. 발꿈치를 들어 톡, 토슈즈 끝으로 서는 동작은 일견 단순하지만, 이는 김주원이 자신의 몸에 봉인했던 수많은 자아 중 하나를 지금 곧 해방시킬 것이라는 신호다. 마침내 신중히 골라낸 캐릭터를 얇고 가녀린 육체에 덧입는 순간, 김주원은 사라지고 ‘배역 속의 그녀’만 남는다. 죽어서도 연인을 지키려는 지고지순한 지젤, 남자를 농락하는 농염한 여인 카르멘, 운명과 싸우는 스파르타쿠스의 아내 프리기아…. 1998년 국립발레단에 입단해 의 여주인공 메도라 역으로 데.. 2007. 9. 3.
닫힌 음악의 경계를 깨는 조용한 혁명가-작곡가 신동일 [ 문화와 나 | 2006년 가을호 ] 서양 음악과 한국 전통 음악의 감수성을 접목해온 작곡가 신동일의 음악을 가리켜 흔히 크로스오버, 또는 뉴에이지 음악으로 분류한다. 하지만 정작 그는 자기 음악의 정체성을 확고히 인지시키기보다, 장르의 벽을 넘어 음악의 즐거움을 대중에게 전하는 일에서 더 큰 보람을 찾는다. 클래식 음악을 전공했으면서도 새로운 형태의 민족 음악을 추구하고, 어린이 노래극, 영화 음악, 국악 관현악 작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해 온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떤 음악 하세요?” 작곡가 신동일은 이 무심한 질문에 내포된 ‘취향의 서열화’에 난색을 표한다. 많은 사람들이 장르를 분류하는 데 그치지 않고, 클래식 음악은 고급 문화, 대중 음악이나 어린이 음악은 하위 문화라는 식으로 속단하기 때.. 2006. 9. 15.
오직 춤을, 업으로 삼다-안무가 홍승엽 [문화와나/ 2006년 여름호] 아차산역 근처에 위치한 무용단 ‘댄스씨어터 온’의 지하 연습실. 왈츠 풍 연주곡에 맞춰 3인무를 추는 남성 무용수들 사이로, 안무가 홍승엽(44)의 날카로운 지적이 쏟아진다. “죽어가는 사람이 살려고 올라오는 장면인데, 술 취한 사람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야.” “걸음에 체중이 안 실리네, 체중, 체중, 체중!” 전용 의자에 앉아 손짓으로 움직임을 지시하던 홍승엽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는가 싶더니, 급기야 무용수들 앞으로 나선다. 느슨한 삼각 대형을 이뤄 흐느적흐느적 춤추던 무용수들이, 추가된 꼭짓점을 중심으로 갑자기 긴장한다. 그가 춤추며 두 팔을 솟구쳤다 툭 떨어뜨릴 때, 안무가 홍승엽은 사라지고, 죽음과 삶 사이에서 휘청대는 익명의 인간만이 남는다. 리듬을 타고 분방.. 2006. 6. 17.
대추리 들판의 ‘야릇한 흰 공’ 찍어온 사진가 노순택 [미디어다음/2006. 5. 13] 평택 대추리 황새울 들녘에, 30미터 높이의 거대한 흰 공이 우뚝 서 있다. 대추리 어느 곳에서나 도드라지게 눈에 뜨는 공의 정체는 ‘레이돔’, 주한미군 캠프 험프리 소유의 돔형 레이더다. 햇수로 3년간 이 공의 정체를 추적하며 대추리 풍경을 찍은 다큐멘터리 사진가 노순택(37)을 만났다. 노순택은 ‘분단의 향기’라는 이름으로 한국의 분단 현실에 기인한 여러 사건들을 사진으로 기록해왔다. 2004년 초 대추리를 방문한 것도 그런 작업의 연장선상에서였다. ‘평화유랑단’을 이끌고 대추리에 온 문정현 신부의 다큐멘터리 사진작업을 위해 동행했다가, 자연스럽게 평택 미군기지 이전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대추리 농민들의 일상을 사진으로 기록하면서 유독 눈에 띈 것이 바로 들.. 2006. 5.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