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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몸 안에 깃든 영원한 삶의 욕망-정은정 사진전 Oct. 12. 2001 | 몸통이 잘려나간 채 눈 덮인 들판에 덩그러니 놓인 황소 머리, 엉덩이에 푸른 등급표시가 선명하게 찍힌 돼지, 털이 죄다 뽑힌 오리와 닭. 대안공간풀에서 열리는 정은정 사진전 ‘동물·에피소드 I’에 전시된 10점의 사진은 이처럼 적나라한 죽음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선정적인 소재주의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죽어있으면서도 멀건 눈을 뜨고 관람자를 응시하는 동물의 사체는 죽음에 대한 관음증과 영원한 삶에 대한 욕망이 공존하는 작가의 내면을 반영한다. 유년시절 뇌막염을 심하게 앓았던 정은정은 성장한 후에도 자신을 지배하는 죽음의 강박관념을 ‘연출사진’으로 극복하려 시도한다. 그녀가 만들어낸 죽음의 현장은 피 한 방울 찾아볼 수 없는 안전한 풍경이며, 때로는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예컨대.. 2001. 10. 12.
산모와 아기 중시하는 대안적 출산문화 Oct. 09. 2001 | 고통 없이 건강한 아기를 낳는 일은 모든 임산부의 희망일 것이다. 한국에서 제왕절개 분만을 선택한 여성이 43퍼센트라는 통계는 임산부가 산고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하는 선택의 폭이 넓지 않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용기를 내어 자연분만을 결심한다 해도, 밝은 조명이 쏟아지는 분만대 위에 결박당하듯 누운 임산부는 환자 취급을 받으며 불안을 느끼기 마련이다. 인권분만을 주장하는 산부인과 의사 미셸 오당의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출산》(장은주 옮김, 명진출판)은 이같은 출산문화에 의문을 제기하는 책이다. 1970년대부터 프랑스 피티비에 병원에서 시행된 분만법의 실례를 다양한 도판과 함께 보여주는 이 책은 이제 막 수중분만, 그네분만 등 대안적 출산문화가 도입되기 시작한.. 2001. 10. 9.
순수문학과 문학컨텐츠가 공존하는 디지털시대 한국문학 Oct. 08. 2001 | IMF 이후 문학시장의 침체와 함께 순수문학의 위기가 언급된 건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전통적인 등단과정 대신 PC통신과 인터넷 독자층의 조회 수에 힘입은 통신작가의 탄생, 판타지소설을 위시한 장르소설의 성행 등 디지털문화를 기반으로 한 독자와 작가의 등장은 문단 한편에서 우려의 목소리를, 다른 한편에서는 변화의 바람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새로운 문학의 필요성이 빈번하게 제기된 반면 사이버문학에 대한 찬반 논란이 분분하고, 전범이 될만한 하이퍼텍스트 문학도 부재한 상황이라 이런 논의는 추상적인 결론으로 귀결되거나 변화에 대한 강박증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강박증상의 단적인 예는 ‘2000년 새로운 예술의 해’ 문학분과위원회가 주관하고 문학평론가 정과리씨가 책임위원을 맡은 프.. 2001. 10. 8.
영국 개념미술의 실험 무대 ― 런던 언더그라운드전 Sep. 27. 2001 |1988년 런던 동부 도클랜드의 한 창고에서 데미안 허스트, 게리 흄, 사라 루카스, 사이먼 패터슨, 질리안 웨어링 등 골드스미스 미술대학생들을 주축으로 열린 ‘Freeze’전이 YBA(Young British Artist)세대를 출범시켰다면, 화력발전소 건물을 개조해 2000년 5월 개관한 테이트 모던 갤러리는 런던을 현대미술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각시켰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현대미술의 중심지가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왔지만, 이제 21세기 미술계가 주목할 곳은 영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곡미술관에서 9월 19일부터 11월 18일까지 열리는 런던 언더그라운드전은 이처럼 주목받고 있는 영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폭넓게 관찰할 수 있는 기회다. YBA의 산실인 골드스미.. 2001. 9. 27.
과학으로 해부한 지능의 신비 ― 《타고난 지능, 만들어지는 지능》 Sep. 24. 2001 | 왜 흑인은 백인보다 IQ지수 평균점수가 낮을까? 지능을 결정하는 건 유전적 요인일까, 환경적 요인일까? 영재와 모범생은 어떻게 다를까? 앵무새나 침팬지에겐 지능이 있는 걸까? 외계에는 지능을 가진 생명체가 정말 존재할까? 지능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학술적 분석부터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가십거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을 띠지만, 지능의 메카니즘을 밝혀내기란 쉽지 않다. 《타고난 지능, 만들어지는 지능》(이한음·표정훈 옮김, 궁리출판)에 실린 12편의 글은 인간, 동물, 기계, 심지어 외계 생물에 이르기까지 지능과 관련한 다양한 논점을 보여준다. 미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특집기사로 12회에 걸쳐 연재된 글을 엮어 펴낸 이 책은 각각의 장이 독립적이어서 관심 있는 부분.. 2001. 9. 24.
절망 속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힘, 사랑-《자기 앞의 생》 Sep. 24. 2001 | 모든 사람은 어린 시절과 작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그 시절을 보냈느냐에 따라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도 있고, 회복하기 힘든 고통으로 남을 수도 있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지정숙 옮김, 문예출판사)은 삶을 증오하고 마음을 닫는 대신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견디며 암울한 어린 시절을 떠나보내는 고아소년 모모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1975년 메르뀌르 드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 책의 표지에는 초현실적인 드로잉이 그려져 있는데, 상상계와 암울한 현실을 오가는 모모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얼굴도, 따뜻이 안아줄 두 팔도 없는 여인의 다리 한편에 걸터앉은 어린아이의 옆모습은 담담하지만 쓸쓸하다. 여인의 모습이 불완전한 것은 한번도 어머니를 본 .. 2001. 9.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