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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제품 | 전시 | 공연

마법의 손처럼 힘차게 뻗어나가는 여성의 힘 - 윤석남전

by 야옹서가 2003. 10. 22.

Oct. 22. 2003
| 히딩크 감독이 어눌한 한국어로 “하늘만큼 땅만큼” 하고 외치는 한 CF를 보면, 그가 손을 한껏 뻗어 휘젓는 궤적을 따라 커다란 동그라미가 생겨나는 걸 볼 수 있다. 광고 자체는 좀 어색했지만, 덕분에 손을 뻗는 행위의 상징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다. 마음을 몸짓으로 나타낼 때 가장 넓은 영역을 표현할 수 있는 건, 바로 손을 둥그렇게 내 뻗는 일 아닐까? 손을 내밀어 확장되는 심리적 영역은, 가만히 서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폭으로 넓어진다. 닫힌 마음을 열어 상대방이 내게로 오는 길을 터주는 건, 손을 한껏 뻗는 단순한 동작만으로 충분히 가능하다.

침묵을 깨고 타인과 연대하는 여성의 잠재된 힘
이처럼 손을 뻗는 행위의 상징성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일민미술관에서 11월 30일까지 열리는 설치미술가 윤석남(64)의 ‘늘어나다’전을 무리 없이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통산 일곱 번째인 이번 개인전에서 윤석남은 기형적으로 긴 팔을 가진 목조여인상을 새롭게 선보였다. 불완전한 형태의 의자에 나뭇조각을 덧댄 전작들을 기억한다면 아마 느낌이 사뭇 다를 것이다. 목석처럼 말없이 인내하며 살기를 강요받아온 한국여성의 한 서린 삶을 묘사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과의 연대를 향한 적극적인 행위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시장’(2003)에서 커다란 고래를 머리에 인 여인이 긴 팔을 아래로 늘어뜨려 작은 물고기 떼를 어루만지는 모습은 그 대표적인 예다. 여인은 모성을 상징하는 고래를 가뿐히 치켜들고 마치 인도하듯 물고기들을 향해 손을 뻗는다. 하늘과 바다, 서로 이질적인 두 공간 사이에서 길게 늘어난 팔은 상징적인 다리가 된다. 검은 먹선으로 그려진 여인의 투박한 얼굴에서는 침묵 속에 내재된 힘을 읽을 수 있다. 또한 기생이면서도 탁월한 연애시로 창작욕구를 표출했던 이매창과 작가 자신을 교차시킨 ‘종소리’(2002), 못 박힌 붉은 심장을 한 손에 움켜 쥔 ‘김혜순’(2002), 비운의 문인 ‘허난설헌’(2002)처럼 실존 인물을 묘사한 작품 역시 억눌린 여성 현실을 딛고 일어서려는 작가의 의지가 녹아 있다.

그네처럼 삶의 제약 박차고 하늘로 솟구치는 의지
 ‘늘어나다’전에 전시된 신작들에서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요소로 그네처럼 허공에 매달린 형식의 작품들이 많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가시처럼 가느다란 다리로 불안하게 서 있는 의자 형상으로 땅을 딛고 서 있었던 윤석남의 조각들은, 이제 과도기적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비록 ‘섬’(2003)에서처럼 우물을 연상시키는 낡은 드럼통에 갇힌 여성의 모습도 등장하지만, 그네가 끊임없이 하늘을 향해 솟구치듯, 위태로운 피아노 줄에 매달린 그의 조각들 역시 바닥을 벗어나 공간을 점유하며 도약을 꿈꾼다.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굴레처럼 작용하는 한국사회에서 굳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 작가’ 라고 표방하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듯, 그의 작품 전반에는 페미니즘의 시선이 녹아있다. 마흔이 넘는 나이에 늦깎이로 그림을 시작해 주변인으로서의 경험에 익숙한 작가는 전투적인 페미니즘이 아닌, 상징적인 자신과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한국 여성의 삶을 표현하는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본 전시의 관람료는 1천원이며 매일 오전 11시∼오후9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공휴일 오후7시까지 개관, 월요일 휴관) 설치작품과 별도로 2층 소전시실에 전시된 16점의 드로잉을 보면 창작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자세한 문의는 02-2020-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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