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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가 사랑한 고향, 안좌도 청자색 그 바다-전남 신안군 김환기 생가 마을

 



한국 근대회화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김환기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화가가 유년시절을 보낸 전남 신안군 안좌도의 생가 마을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읍동항에서 1km 남짓 떨어진 김환기 생가까지 향하는 길목마다 벽화와 조형물로 태어난 김환기의 작품세계를 접할 수 있다. 예술의 섬으로 거듭난 안좌도를 돌아본다.


이른 봄의 안좌도 앞바다는 고려청자 빛이다. 연두색이라기엔 흐리고, 회색이라기엔 푸른 오묘한 빛깔. 읍동항 선착장에 닿자마자‘ 이건 김환기의 바다다’ 싶었다. 김환기가 영원을 상징하는 구름, 학, 사슴,달항아리 등의 소재들을 화폭에 옮겨 넣을 때 즐겨 칠한 바탕색도 이렇게 은은한 회녹색과 회청색이었다. 썰물 때면 갯벌이 바닥을 드러내고 밀물 때면 찰랑찰랑 차오르던 이 바다에서 뛰놀며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화가의 붓에 담긴 은은한 색감에 고향의 오묘한 바다색이 배었을 것은 당연했다. 이제야 그 빛깔이 어디서 왔는지 알겠다. 어린 시절, 화가의 뇌리에 또렷이 각인된 바다는 그렇게 그리운 옛 도자기의 빛깔이었으니 말이다.

승선권 매표소 겸 매점에도 김환기의 점묘화에 등장하는 깨알 같은 점들이 알알이 그려져 있고, 간이 여객대기실 안에도 김환기 그림벽화로 가득 차 있으니 여기가 바로 김환기의 고향이란 게 비로소 실감난다. 돌아가는 배 시간부터 먼저 확인하고 선착장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본다. 여기서부터 읍동리의 김환기 생가까지는 1㎞ 남짓. 타박타박 걸으며 화가의 고향을 돌아보기에는 적당한 거리다.


배 위에서도 또렷이 보이던 대형 벽화 1점은 김환기의 대표작‘ 항아리와 여인들’(1951)의 부분도를 제법 그럴듯하게 옮겨놓은 모습이다. 여인들이 품에 소중히 안거나 머리에 인 백자를 바라보노라니 김환기의 도자기 수집 취미에 얽힌 일화가 떠오른다. 1944년 김환기와 재혼하여 평생의 반려가 된 김향안의 수필집‘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는다’에는 다음과 같은 회고담이 나온다. 화가가 1944년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까지 매일 사 모으다시피 한 도자기가 성북동 집에 가득했다는 대목이다.
 

“김환기가 좋아한 것은 자기 팔로 안아서 한아름 되는 유백색乳白色 대호大壺와 청백살(淸白피부)의 큰 항아리들이었다. 때로는 마당에 내다가 육모초석(六角礎石)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며 뙤약볕을 피해서 그늘에 옮겨놓고. 그 항아리들은 김환기에 있어 살아 있는 생명체와도 같았다.”

 

오래된 도자기는 세월을 담고 있다. 사람의 목숨은 고작 100년 안팎이지만, 수백 년 전 어느 도공이 혼을 실어 빚은 도자기의 수명은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났을 때 사람의 한평생을 훌쩍 뛰어넘는다. 김환기가 그렸던‘ 영원한 것들’의 목록에서 도자기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화가가 모은 도자기들은 한국전쟁의 참화를 피해가지 못했다. 부산으로 피난 가기 전, 딴에는 안전히 보관하느라 우물에 던져 넣었던 도자기들을 나중에 건져 보니 모조리 깨져 있었단다. 참담했을 화가의 마음은 지금도 헤아릴 수 있겠다. 아끼던 도자기를 되살릴 수는 없었지만, 김환기는 이를 그림 속에 그려 넣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었다.

담벼락 따라 고요히 흐르는‘ 영원의 노래’
‘항아리와 여인들’이 그려진 건물 옆의 비료창고에는 1958년작‘ 사슴’이 그려져 있다. 김환기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있던 시절, 당시 홍익대학교 도서관장이던 미술평론가 고故 이경성 씨의 방이 적적해 보인다며 선물로 주었던 그림이다.‘ 우정의 증표’로 화가의 손을 떠났던 사슴 그림은 이렇게나마 화가의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화가가 영원의 상징으로 여겼던 사슴의 이미지는 선착장에 설치된 4개의 사슴 동상부터 김환기 공원의 타일벽화, 생가 맞은편 주택에 그려진 벽화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모습을 바꿔가며 등장한다. 김환기 생가를 찾아가는 길목에 몇 마리의 사슴이 등장하는지 헤아려보는 것도 화가의 고향에서 찾는 또 다른 재미겠다.


전남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에 위치한 생가 마을로 접어들면 심심할 겨를이 없다. 한전 안좌출장소에서부터 화가의 생가까지 2차선 도로를 따라 늘어선 건물 벽에 김환기의 그림들이 드문드문 그려져 있어서다. 화가의 고향이‘ 2010마을미술프로젝트’ 시행지로 선정되면서 생긴 변화다. 마을미술프로젝트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마을미술프로젝트 추진위원회와 (사)한국미술협회가 공동주관한 공공미술 프로젝트이다. 특히 화가의 생가 맞은편에 있는 대여섯 채의 주택에는 화가의 대표작‘ 영원의 노래’에 등장하는 구름과 달, 도자기 등이 가로로 길게 그려져 있어 장관을 이룬다.

읍동리에서 천석꾼 부자로 유명했던 화가의 부친은 멀리 백두산에서 자란 적송을 가져다가 1926년 지금의 생가를 지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생가는 북방식 ㄱ자형 한옥의 안채로 66㎡(20평) 정도의 아담한 규모인데, 1950년대 이후 화가의 친척이 거주하다 1970년대 신안교육청이 매입해 안좌초등학교 관사로 이용했던 덕분에 건물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신안군에서 1999년 생가를 매입하고 2006년 정비를 완료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선보였다고 한다.


다만 생가에서는 화가의 체온이 담긴 유품이나, 하다못해 조그만 스케치 원화조차 볼 수 없는 점이 아쉽다. 이미 서울 부암동에 화가의 이름을 딴 환기미술관이 있는 데다, 만만찮은 그림 가격 탓에 화가의 원화를 구매하기가 어려우리란 것은 짐작이 간다. 화가의 원화를 볼 수는 없지만, 안좌도를 일본의 나오시마 같은‘ 예술의 섬’으로 조성하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2008년부터 안좌도에서 매년 열리는 김환기국제미술제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화가가 태어난 예술의 고향을 기리는 세계 예술가들이 모여 전시도 하고 창작도 한다니 미술제전이 열리는 무렵 섬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또한 2013년 완공을 목표로 읍동리 치동저수지 인근에 130억 원을 들여 김환기 미술관을 건립 중이라고 하니, 미술관 완공 이후 사뭇 달라질 화가의 고향을 기대해본다.


고향의 자연을 사랑했던 김환기

김환기의 생가는 소나무가 우거진 안산에 둘러싸여 있다. 녹음이 우거진 풍경을 사랑했던 그는“ 순하디순한 마을 안산案山에는 아름드리 청송이 숨막히도록 들어차 있다”고 회상하면서“ 고향 생각은 곧 안산 생각뿐”이라고 털어놓았던 바 있다. 얼마나 나무를 사랑했던지 화가는 자신만의 아틀리에를 꿈꿀 때도“ 창을 열어젖히면 푸른빛이 눈에 들어올 수 있는 정도의 정원, 그래서 내가 구상을 하며 거닐 수 있는 그런 집을 하나 꼭 갖고 싶다”고 했었다. 복잡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 다른 곳을 향했을 때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한 그루의 싸리나무”이길 바랐던 남자.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아호雅號를 정할 때도 평소 좋아하던 한자인‘ 나무 수樹’자를 먼저 고르고 이에 어울리는 글자를 한참 뒤에야 붙여서‘ 수화樹話’라는 단어를 완성했다고 한다.

김환기의 생가가 자리 잡은 풍경을 멀리서 조망해보고 싶어 생가 맞은편의 산길을 오른다. 흙바닥이었을 마을길은 대부분 콘크리트로 다시 포장됐지만, 생가 주변의 가옥에는 예스러운 돌담길이 남아 있어 운치를 더한다. KT안좌중계소로 이어지는 호젓한 산길 오른편으로는 편백나무가 훌쩍 큰 키를 자랑하며 줄지어 서 있다. 봄비에 촉촉이 젖은 편백나무 숲을 거닐며 나무를 사랑했던 화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큰 화가가 되리라는 부푼 꿈을 갖고 고향을 떠난 청년 시절의 화가에게 안좌도는 좁기만 한 곳이었으리라. 그가 회상한 고향 풍경은 이런 것이었다.

 

“내 고향은 전남 기좌도. 고향 우리 집 문간에 나서면 바다 건너 동쪽으로 목포 유달산이 보인다. 목포항에서 백 마력 똑딱선을 타고 호수 같은 바다를 건너서 두 시간이면 닿는 섬이다. 그저 꿈같은 섬이요, 꿈속 같은 내 고향이다.(…)친구들이‘ 자네 고향섬이 얼마큼 크냐?’고 물으면‘ 우리 섬에선 축구놀음은 못 한다’고 대답한다. 공을 차면 바다로 떨어질 것 같기 때문이다.”

 

다소 익살스러운 과장이 곁들여지기는 했지만, 당시만 해도 배를 타고 두 시간을 가야 육지에 닿을 수 있었던 작은 섬 안좌도(옛 기좌도)에 대한 화가의 인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대미술의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일본으로, 파리로, 뉴욕으로 떠돌며 예술혼을 불태웠던 김환기였지만, 결국 그의 마음이 가장 편안했던 곳은 고국의 자연이었고, 고향의 안산 아래가 아니었을까. 생가 마을의 벽화를 돌아보는 길에 발견한 화가의 자필 편지 한 장을 읽다가, 고향을 그리던 노화가의 애틋함이 느껴져 마음이 애잔해진다. 타일벽화로 재현된 이 편지는 안좌도의 친척에게 보낸 것으로 1971년 8월 17일자 소인이 찍혀 있다. 편지 내용의 일부를 옮겨본다.

“(…)고향故鄕소식을 들으니 반가웁기는 하니 서글픈 생각뿐이요. 서울보다도 고향故鄕이 보고 싶어 빨리 귀국歸國하고도 싶으나 외국外國에 나와 살다보니 자연 늦어만 집니다. 허나 명춘明春에는 한번 나가야 될 것 같애요.”


편지는 고향 마을로 돌아왔건만, 화가는 3년 후인 1974년 타향 만리에서 별세할 때까지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이른바‘ 뉴욕 시기’로 불렸던 1963년 이래 작고하기 전까지 뉴욕에 체류하면서 창작한 수많은 점묘화를 가리켜 혹자는 마천루의 불빛 같다 하고, 혹자는 밤하늘에 가득한 별빛 같다 했지만, 사실 그가 점점이 그린 형상은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자 그리운 자연의 일부였다.


화가의 생가를 뒤로하고 읍동항으로 향한다. 압해도 송공항과 읍동항을 왕복하는 농협 페리를 타면 2010년‘ 떠도는 미술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그려진 김환기의 작품들이 선실 내외에 재현된 모습도 볼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김환기의 초기작‘ 론도’(1938)를 갑판에서 감상할 수 있는 만큼, 시간 맞춰 타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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