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나/ 2006년 봄호] 통유리창 아래로 호수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일산의 한 오피스텔 11층에, 삼면을 책으로 둘러싼 방이 있다. 방이라기보다 사설 도서관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이 곳이 소설가 김연수(37)의 작업실이다. 집과 작업실을 오가는데 쓰임직한 자전거를 한쪽으로 밀고 들어서면, 유리창 너머 탁 트인 하늘을 제외하고 온통 책이다. 역사학자처럼 책의 행간을 촘촘히 훑으며 실마리를 수집하고, 이를 소설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김연수의 작품이 여기서 태어난다. 

작업실 오른쪽 벽에는 책이 늘어날 때마다 하나씩 사들였을 5단 원목 책꽂이가 포진했고, 왼쪽 벽에는 워드 프로세서의 표 만들기 도구로 그린 것처럼 네모반듯한 7단 맞춤 책꽂이가 빼곡히 들어찼다. 미처 꽂힐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 책들은 스크럼을 짠 시위대처럼 책꽂이 아랫단을 따라 낮은 담을 이뤘다. 이 모든 풍경이 책으로 쌓은 조그만 성곽 같다.


인간의 몸에 기록된 역사를 찾아서

‘책 속에 길이 있다’는 표현은 진부하기 짝이 없지만, 적어도 김연수에게는 들어맞는 말이었다. 천문학을 꿈꾸던 고3 수험생의 진로를 비틀어 문학도로 바꿔놓은 게 바로 책 한 권의 힘이었으니. 동네 서점에 ‘창비 시선’과 나란히 꽂힌 ‘문지 시선집’ 앞을 서성거리다, 그는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집어 들었다. 황지우의 걸출한 첫 시집은, 한국 현대 시집을 생전 처음 사 본 소년에게 ‘시를 쓰고 싶다’는 충동을 부추겼다. 김연수가 다소 멋적게 “참으로 난해하고도, 참으로 자동 기술적이며, 참으로 유치한” 것이었다고 회고하는 자작시를 이 무렵 쓰기 시작했으니, 분야는 달라도 작가로서의 자의식은 고교 시절 이미 싹튼 셈이다.

 

대학을 채 졸업하기도 전인 1994년 펴낸 장편 소설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한 이후에도 그는 쭉 책과 함께 해 왔다. 1997년부터 2002년까지 직장 생활을 할 때도 출판저널》의 ‘김 기자’였고, 인터넷 서점 웹진 부커스의 ‘김 과장’이었다. 지금은 소설가이자 번역가로 살고 있으니 그에게 책은 그에게 창작의 원천이자 결과물로서, 또한 생업 수단으로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인 셈이다.

 

한데 그가 책과 당분간 거리를 두려 한단다. 더 이상 소설의 원천을 책에서만 찾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방대한 자료와 자료 사이를 이동하면서 조밀하게 이야기의 그물망을 짜 온 전작들을 생각해 보면 다소 의외다. 그러나 최근에 펴낸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기점으로 보면, 그의 시선이 ‘몰개성적인 사료’가 아닌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를 지닌 인간’ 쪽으로 선회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책은 가장 큰 원천이죠. 상상하게 만드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해도 책으로는 알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저는 그 자료들이 기술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소설을 씁니다. 역사책에서 배제된 인간의 감정 같은…. 예를 들면 ‘전쟁에서 일본군이 나를 포위한다면 어떤 감정을 느낄까?’ 같은 의문들이죠. 그렇게 개인이 경험한 역사적 사건은 몸으로밖에는 이해할 수 없어요.”


허구의 자료로 만드는 진짜 이야기

김연수는 첫 장편 소설을 펴낸 뒤에 “‘진짜 그런 이야기’가 아닌, ‘그럴 듯한 이야기’를 쓰는 소설은 구차한 장르 같았다”며 소설을 과연 계속 써야 하는지, 차라리 역사가가 되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그의 첫 소설에는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서 재인용한 데카르트의 라틴어 경구가 등장하는데, ‘Larvatus Prodeo(라르바투스 프로데오)’가 그것이다. “나는 손가락으로 내 가면을 가리키면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이 경구는, 한 손으로는 연극을 하듯 거대한 허구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 그것의 진실을 쉼 없이 가리켜 온 작가의 젊은 날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같은 관점은 그가 인터넷 상의 아이디로 오랫동안 고집해 온 ‘Larvatus’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키워드 하나만으로 인터넷 어디서든 김연수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 만큼, 그는 자신의 소설가로서의 정체성과 이 단어를 동일시해 왔다. 이제 이 단어와도 작별을 고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Larvatus’의 유효 기간은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 끝난 것 같아요. 더 이상 그런 게 중요하지 않고, 현실이나 환상이나 똑같아 보인다는 거죠. 이제는 가짜 자료로 만드는 진짜 같은 소설, 이를테면 ‘소설로 역사를 쓰는 소설’에 관심이 있어요.”

 

역사를 자료 삼아 소설로 재편하는 시도를 하던 작가는, 이제 역으로 개인의 ‘소설 같은 이야기’에서 출발해 역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 있다. 문학 계간지 파라21》에 연재한 소설 <밤은 노래한다>가 그런 경우다.

“1930년대 만주에서 독립 운동을 했던 유격대에서, 이씨 왕조를 세우자는 부류와 중화민국을 만들자는 부류가 충돌해 서로 총질하다 죽은 사건이 있었죠. 그놈의 마음이 하도 이상했어요. 해방 직후도 아니고 만주까지 가서 어떻게 같은 편을 죽일까? 공격성에 대하여》라는 콘라트 로렌츠의 책을 읽으면 자기 종족을 먹는 물고기에 대한 글이 나와요. 웬만하면 동물도 자기 종을 먹는 짓은 하지 않는데, 그런 점이 묘하게 울렸죠.”

 

1994년 경 우연히 읽은 짧은 글에서 소설의 실마리를 얻었고, 그 ‘묘한 놈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시작했지만, 만만치 않은 주제라 쉽사리 덤벼들지 못했다. 근 10년이 흐른 뒤에 ‘이제는 글을 쓸 수도 있고 중국에 갈 수도 있겠다’ 싶어서 2003년 12월부터 열 달을 연변에 머물며 자료를 수집하고 글을 썼다. 5단 책꽂이를 채우고도 넘치는 참고 서적과, 작업실 벽 한 쪽에 붙은 ‘2003년 신판 길림성 지도’는 소설을 쓰는 데 들인 공력을 보여 준다. 이 소설은 4월께 다시 한 번 연변을 방문하고 좀 더 손보아, 올 여름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현실과 환상의 접경 지대를 꿈꾸며

<밤은 노래한다>가 그에게 특히 의미 있는 이유는,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연변이 일종의 경계선상에 있는 공간, 접경 지대를 상징하는 데 있다. 그는 종종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다루는 일에 매료된다고 했다. 그가 소설 속에서 그리는 상징적 국경은 현실에서 비현실의 세계로 넘어가기 바로 직전, 경계점 끝까지 밀고 나가 정점에 도달한 순간에 있다.

 

“이 인식의 국경을 넘어서면 이른바 정신 질환이 되지만, 넘어가려고 시도하다가 잡종이 되고 혼종이 되는 아슬아슬한 단계에서 멈춘 것이 소설이지요.” 남들이 가 보지 못한, 국경선 같은 인식의 지평에 끌린다는 김연수는, 이런 끌림이 오늘날의 시대 정신과 궤를 같이한다고 믿는다. 이른바 ‘중앙’에 문단이 있던 시절, 민족주의를 파급시키는 도구로 활용된 것이 문학이었다면, 구심 사상도 ‘중앙’도 없어진 오늘날에는 변방에서 모든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는 최근 이 국경마저 무화시키는 소설을 구상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놈의 민족 이야기를 벗어나 볼까 싶은 것이다. 한반도 남쪽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소설을 넘어, 하다못해 아시아 3개국에서만이라도 보편타당하게 공감할 수 있는 세계를 그려내고픈 욕망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일종의 ‘국적 없는 소설’을 펼쳐 보인 것처럼 말이다. 문학 평론가 김병익이 적확히 짚어냈듯이,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서 ‘지금-이곳’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저곳’, 혹은 ‘그때-이곳’, ‘그때-저곳’을 서술하며 광대한 시공간을 넘나들고, 주인공 역시 다양한 국적의 인물들로 그 범위가 넓어졌다는 사실은, 무경계의 소설을 지향하는 의도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꾸준한 소설 쓰기와 더불어, 최근 김연수는 ‘소설 읽기’에 빠져 있다. 이름하야 ‘명작의 여주인공’ 프로젝트다. 첫 번째 타자는 보바리 부인》이다.

“세계 문학에서도 멋진 남주인공은 별로 없지 않아요? 줄리앙 소렐(적과 흑》의 주인공) 정도 있을까, 거의 변태죠. 그런데 멋진 여주인공은 많죠. 보바리 부인》을 보면 사랑을 나누고 돌아오는 여자의 동공이 커져 있다고 묘사되어 있는데, 그런 점까지 잡아내는 플로베르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한국 작가들이 묘사하는 여주인공은 거의 판타지예요. 그 부분이 부족해서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고 있어요. 명작 소설은 두께도 엄청나고 지루하지만, 견디고 견디면 보석 같은 장면들이 나오거든요. 견디지 않으면 그 장면을 만날 수 없어요.”

 

때론 진지하고, 때론 개그 같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작업실을 한 바퀴 돈다. 문득 책상 위에 메모판 대신 매달린 죽부인이 눈에 띈다. “리얼리티는 변해가는 것이므로, 그것을 표현하고자 한다면 표현 양식도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브레히트의 글이 또박또박 쓰여 있다. 김연수가 그려 나가는 세계 역시, 경계를 넘나드는 인식의 흐름을 따라 무한히 변화하고 팽창할 것임을 믿는다.

김연수 | 소설가.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1993년 《작가세계》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성균관대 영문학과 4학년 재학 중 첫 장편 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1994)로 제3회 작가세계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선회했다. 장편 소설 《꾿빠이, 이상》(2001)으로 제14회 동서문학상을,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2002)로 2003년 동인문학상을,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2005)로 제13회 대산문학상을 받았고, 2005년 문화관광부 선정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했다. 이 밖에 소설집 《스무 살》(2000), 경장편 《사랑이라니, 선영아》(2003), 산문집 《청춘의 문장들》(2004)을 냈으며,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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