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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제품 | 전시 | 공연

죽은 몸 안에 깃든 영원한 삶의 욕망-정은정 사진전

by 야옹서가 2001. 10. 12.

Oct. 12. 2001
| 몸통이 잘려나간 채 눈 덮인 들판에 덩그러니 놓인 황소 머리, 엉덩이에 푸른 등급표시가 선명하게 찍힌 돼지, 털이 죄다 뽑힌 오리와 닭. 대안공간풀에서 열리는 정은정 사진전 ‘동물·에피소드 I’에 전시된 10점의 사진은 이처럼 적나라한 죽음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선정적인 소재주의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죽어있으면서도 멀건 눈을 뜨고 관람자를 응시하는 동물의 사체는 죽음에 대한 관음증과 영원한 삶에 대한 욕망이 공존하는 작가의 내면을 반영한다.

유년시절 뇌막염을 심하게 앓았던 정은정은 성장한 후에도 자신을 지배하는 죽음의 강박관념을 ‘연출사진’으로 극복하려 시도한다. 그녀가 만들어낸 죽음의 현장은 피 한 방울 찾아볼 수 없는 안전한 풍경이며, 때로는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예컨대 ‘A Duck on My Bathtub’(1999)에서 깃털이 다 뽑힌 채 미끈한 맨살을 드러낸 오리는 시체안치소의 인식표를 닮은 꼬리표를 발목에 매달고 있다. 그러나 분홍색 타일과 흰 욕조가 만들어내는 쾌적한 분위기는 마치 갓 목욕을 마치고 욕조에 나른한 몸을 기댄 여인과 같은 에로틱한 연상마저 이끌어낸다.

연출사진으로 극복한 죽음의 강박관념
또다른 예로 전시된 작품 중 ‘A Lamb with Dandelions’(1998)의 경우 죽음을 상징하는 양의 머리와 삶을 상징하는 꽃핀 들판이 교차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몸통 없이 머리만 남은 동물의 시체는 섬뜩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피가 흥건한 바닥 대신 생명력이 넘치는 들판 위에 올려져 양의 머리는 죽었다기보다 편안하게 쉬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고요한 자연과 죽은 동물 머리의 병치라는 테마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요소 중 하나다.


이처럼 정은정이 반복해서 보여주는 동물 머리에 대한 집착은, ‘한 때 살아있었던 생명체’와 ‘정육점 고기’를 구분하는 가장 명확한 표지가 동물의 머리라는 점에 기인한다. 특히 머리에 부속된 물체 중에서도 눈은 죽음을 초월한 힘의 상징으로 인용된다. 육신은 이미 죽었지만 사진 속에서 여전히 응시하기를 그치지 않는 눈은 삶의 유한함을 넘어선 초월적 존재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는 “사진에 담긴 피사체는 사진 찍히는 순간 죽지만, 그 안에 포착된 사물은 역설적으로 영원한 삶을 얻는다”는 롤랑 바르트의 논지와도 부합한다.

사진평론가 최봉림은 정물의 영어 표기인 스틸 라이프(still life)가 ‘움직이지 않는 정적인 생명’을 뜻하는데 반해, 불어 표기인 나튀르 모르트(nature morte)는 ‘죽어서 움직이지 않는 자연’을 의미함을 비교하면서 “정은정의 정물은 ‘스틸 라이프’와 ‘나튀르 모르트’의 사이를 오가며 엮어내는 복잡한 의미망”이라 평가한 바 있다. 정은정이 사진을 매개로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유머러스하지만, 그 연출된 유머 속에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힘이 내재돼있다. 이번 전시는 10월 23일까지 열리며, 개관시간은 오전 11시부터 6시 30분까지다. 수요일은 정오부터 오후 8시까지로 관람시간이 연장된다. 문의 02-735-4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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