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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함께 있었을 뿐인데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고양이와 살아본 사람이라면 경험했을 마법 같은 순간이 있다. '고양이 화가' 이경미는 그 소중한 경험을 담아 고양이를 그린다. 그의 그림 속에서 고양이는 모델일 뿐 아니라 마음을 다독여주는 친구이고, 신비한 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자다. 겉으로 보이는 고양이의 모습은 하나지만, 이경미의 고양이 그림은 보는 이의 마음과 경험의 폭에 따라 여러 겹의 의미를 지닌다. 그의 네 번째 개인전 <李나나+金랑켄>전이 열리는 청담동 표갤러리와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갤러리에 들어서면, 나란히 걸린 고양이 초상화 한 쌍이 눈에 들어온다. 제목이 각각 <李나나>와 <金랑켄>이다. 성격이 예민하고 때론 까칠한 10살배기 토종고양이 나나가 작가의 성격과 닮았다면, 4살배기 페르시안 친칠라 랑켄은 곧 결혼할 남자친구의 성격과 꼭 닮아서, 예비부부의 성을 붙여 제목을 지었다. 고풍스런 액자를 가린 벨벳 천을 잠시 걷고 그림을 보여준 것 같지만, 이 그림은 섬세하게 그린 눈속임 그림이다. 그림 일부를 가린 듯, 살며시 보여주는 이 천은 이경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아버지가 알코올중독을 앓았고 어머니가 한복집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느라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어요. 한복집도 번듯한 가게가 아니라 주문받은 일감 떼어다 만드는 그런 영세한 곳이었죠. 근데 어머니의 한복 천을 어깨너머로 보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어머니가 한복 일을 못하게 되셨을 때, 그 천을 받아다가 지금도 작품에 그리고 있어요.” 



 


 

어머니 마음처럼 상처를 감싸는 그림
지금도 그의 작업실 한 구석에는 한복천이 돌돌 말려 있다. 작가는 어머니 곁에 늘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한복감의 색과 질감, 주름이 만들어낸 세계에 마음을 빼앗겼고, 바라보기만 할뿐 가질 수 없었던 그것들을 그림 속에 그려 넣었다. 넉넉하게 주름져 그림 속에 치렁치렁 드리운 천은, 세상 모든 아픈 것들을 끌어안는 어머니의 마음과 닮아있는지도 모른다.

한복 천과 더불어 이경미에게 마음의 치유를 상징하는 또 다른 대상은 고양이다. 그와 함께 사는 한국 토종고양이 나나(10)와 페르시안 친칠라 랑켄(4)에게는 아픈 사연이 있다. 나나는 방광결석으로 1년 넘게 병치레를 했고, 랑켄은 어렸을 때 목뼈와 두개골을 다친 상태로 뼈가 아물어 얼굴이 15도가량 한쪽으로 기울었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비싼 병원비와 마음고생을 감수해가며 이들을 거둔 것은, 고양이도 가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장 고단했던 20대를 함께 한 고양이

“원래부터 고학생이었기 때문에 1998년 IMF가 터졌을 때도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1999년 4월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가족들의 생계를 제가 책임져야 했어요. 4학년이었는데 학교 다니면서 새벽까지 아르바이트 하고…. 그해 8월 길에서 5천원을 주고 나나를 데려왔어요. 집에 오면 나나가 은근하게 절 지켜봐주고 ‘냐옹’하고 반길 때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위로를 많이 받았죠.”


하지만 나나가 생후 1년쯤 되었을 때, 갑자기 방광결석이 생겨 수술해야할 상황이 됐다. 어머니는 ‘똥고양이에게 무슨 병원이냐’며 차라리 버리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나의 수술 날, 모녀는 함께 울었다. 딸은 손도 못 써보고 세상을 뜬 아버지와 아픈 나나의 모습이 교차해서 울었고, 어머니는 딸이 힘겹게 번 돈을 헛되이 써버리는 게 속상해서 울었다. 이후로 병이 재발해 한 차례 더 수술을 하고, 주사로 인한 염증이 생겨 1년 가까이 병치레를 해야 했다. 생계를 위해 바빴던 이경미 대신, 병수발을 어머니가 도맡았다. 병원비와 치료비로 수백 만원이 날아갔다. 오랜 투병 끝에 성격도 까칠해졌지만, 그래도 나나는 여전히 소중한 고양이다.

작업실의 이젤 뒤에 숨은 고양이 나나. 원래 수컷이지만 어렸을 때 성별을 몰라 나나라고 이름 붙였다.

 

소중한 것의 가치는 상대적이다

“저는 고양이를 제대로 못 돌봐줄 때도 많고…. 고양이 애호가는 아니에요. 그보다는 고양이 속에 내재된 ‘주변인’의 모습에 마음이 끌렸던 것 같아요. 하지만 고양이들이 버림받고 길을 돌아다니게 놓아두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지금도 세상의 어디선가 죽어가는 사람이 있지만, 제게는 그 ‘5천 원짜리 똥고양이’를 살리는 게 중요했어요. 제 인생에서 가장 고단했던 20대를 나나와 함께 보냈고, 나나가 큰 위로를 줬기 때문이에요. 모든 소중한 것의 의미는 상대적인 거예요.”


이경미가 그런 소중한 마음을 담아 나나를 캔버스에 그리기 시작하자,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품종고양이도 아닌 흔한 토종 고양이를 왜 그리느냐는 사람, 물감이 아깝다는 사람 등 다양했다. 하지만 이경미는 그런 반응을 접하면서 더욱 더 고양이를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낯설어한다는 건, 저처럼 ‘비싼 물감 들여 고양이로 큰 화면을 채우는 짓’을 해본 사람이 지금까지 없었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오히려 더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른 사람들이 안 하는 그림일 테니까요.”

 

 

한데 아픈 고양이와의 인연은 나나로만 그치지 않았다. 2004년 둘째로 들인 랑켄은 원래 이경미의 친구가 키우려던 고양이였다. 하지만 고양이가 생후 1개월 되던 무렵 목뼈가 부러지고 두개골에 금이 가는 사고를 당하자 친구는 키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랑켄은 그 상태로 뼈가 굳어 지금도 목을 15도쯤 기울이고 다닌다.   


“제가 나나를 키우고 그리는 걸 보면서, 주변에서도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 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랑켄도 그중 하나였어요. 한데 사고가 생기면서 결국 친구가 랑켄을 포기한 거예요. 사람들이 품종고양이에게 기대하는 어떤 기대치가 있는데, 그걸 충족시키지 못하니까 안락사 될 뻔했나 봐요. 결국 제가 1년 동안 데리고 있다가, 키우게 됐죠. 이름도 두개골에 상처가 있는 ‘프랑켄슈타인’에서 착안해서  ‘랑켄’이라고 지어주었어요.”

랑켄과 함께한 이경미 작가. 어릴 때 목과 머리를 다친 탓에 뼈가 잘못 붙어, 늘 저렇게 한쪽으로 목이 기운다. 

처음에는 성격 까칠한 나나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없었지만, 랑켄이 떠돌이가 되거나 안락사를 당하는 걸 볼 수는 없었다. 마음의 부담을 안고 데려왔지만 ‘개냥이’(개처럼 인간을 잘 따르는 성격의 고양이)라 부를 만큼 사람을 잘 따르는 랑켄은 금세 가족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래도 좀 더 정이 가는 쪽은 역시 나나다. 
“나나가 까칠하기는 하지만, 첫째의 정이란 게  있거든요.”

 


고통도 행복도 언젠가는 지나간다

이경미는 호기심 어린 고양이의 눈망울에 초월을 향한 갈망을 담고, 말없이 다정하게 위로하는 치유자의 역할을 부여한다. 고양이가 유한한 세상의 인간을 상징한다면, 그 고양이가 발 딛고 선 바다와 우주는 인간이 한없이 작아지는 원시적이고 근본적인 세계를 상징한다. 이경미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크게 느껴지는 고통도, 거대한 인생의 흐름 속에서 보면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상대성의 원리를 믿는다.

“사물을 관찰하고, 공간이나 시간이 어떻게 변하는가 보는 걸 좋아해요. 파도, 구름, 지형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들…. 특히 바다는 저를 압도하는 면이 있어요. 오랜 시간 동안 원시 상태를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왔고, 거친 움직임이 있으면서 때론 평온해지는 모습이 인생과 닮았어요. 죽고 싶을 만큼 힘들 때, 이게 나한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저 파도처럼 어느 순간 지나갈 거라고 생각하면 견딜 수 있어요. 좋은 일이 있어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교만하지 않으려 해요.” 

 

 
일상의 소중함을 수집하는 화가

작가는 부서졌나 싶다가도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고, 거센 바람에 흔들리다가도 다시 평온해지는 파도 속에 마음을 누이고 안정을 찾는다. 그렇기에 마음을 의탁할 파도를 방 안으로, 건물 속으로, 책상 위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자신에게 소중한 의미를 지닌 수집품들을 그림 속에 겹겹이 숨겨둔다. 누군가는 그 요소들을 단순히 장식적인 것으로 치부하겠지만, 그에게는 나름의 의미가 담긴 것들이다.

 


“저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건, 소중한 순간을 수집한다는 의미예요. 사람들이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수집한다면, 저는 ‘긍정적 가치’를 수집하죠. 나를 감싸주는 가치, 나를 위로하는 고양이, 매일매일 사랑할 가족들… 그런 일상의 소중함을요. 그림 속의 세계지도를 보세요. 이 지도 위에서 엄청난 일이 많이 일어났지만, 정작 우리가 그 위에서 찾아야할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의미 있는 가치인 거죠.”


그렇게 일상의 소중함을 수집하는 이경미는 오늘도 고양이를 그린다.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소설 《파랑새》에서 행복을 상징하는 파랑새가 멀리 있지 않았듯, 그에게 삶의 가치를 상징하는 동물은 바로 곁에 있는 고양이다. 그와 함께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남은 생을 함께 할 고양이들이, 그에게는 창작의 영감을 제공하고 호기심의 문을 열어줄 소중한 파랑새인 셈이다. 

작가가 만든 '나나쨈' 시리즈 중 작업실에 남아있는 세 점의 작품. 세 개 모두 손바닥에 가뿐히 올라갈 만큼 작고 앙증맞다. 작가는 일상의 오브제에 그림을 그림으로써, '소중한 대상을 수집한다'는 개념을 부여한다.

이경미의 이번 전시는 오는 10월 7일(화)까지 열린다. 청담역 9번 출구에서 도보 15분 정도 걷다가  횡단보도를 건너 좀 더 올라가면, 그 길 방향으로 오페라 갤러리가 보이는데 이 건물 지하 1층에 표갤러리가 있다. 찾아가는 길 문의는 표갤러리(02-511-5295)


*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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