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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사 | 칼럼/인터뷰

바리공주가 부르는 생명의 노래-시인 김선우

by 야옹서가 2008. 9. 8.

[문화와 나 | 2007년 가을호]

 “저는 버려짐으로써 사랑을 얻은 존재이니, 버려진 것들의 원과 혼을 이끄는 이가 되겠나이다.”

김선우 시인을 만나러 강원도 원주로 가는 길에, 그가 고쳐 쓴 전래 설화 바리공주의 한 대목을 되짚는다. 핏덩이 때 자신을 버린 아비에게 피로 복수하기는커녕, 그 아비 목숨을 구하고자 저승길 떠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여인, 바리공주가 시인의 몸속에 스며든다. 그의 넋을 입은 시인이 닫힌 입술을 천천히 연다. 생명을 낳고 거두는 모태신의 자궁처럼 아득히 벌어졌다 닫히는 입술로, 아프고 슬프고 괴로운 세상의 모든 혼을 위무하는 노래를 읊는다.


김선우는 2007년 7월 펴낸 세 번째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에서 피 흘리며 죽어간 망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가 조심스레 골라낸 시어를 넋대 삼아 내밀 때, 그 넋대를 타고 파르르 흔들며 이승으로 소환된 망자들이 고통스런 기억을 토해낸다. 온몸에 폭탄을 두르고 적을 향해 뛰어든 팔레스타인 아이들,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려가 생지옥을 겪은 열네 살 순애, 세상 구경 한번 해 보지도 못하고 파묻힌 어린 생명들…. 만신이 된 바리공주가 구천을 떠도는 넋을 건져내듯, 시인은 망자들을 위한 천도제를 연다.


관능과 죽음의 이중주

그가 첫 시집에서 보여 준 도발적이면서 건강한 관능미의 세계는 새 시집에서도 여전하지만, 그 사이사이 섬처럼 끼어든 일련의 시들은 다소 낯설기까지 하다. 그러나 기실 그의 시에 녹아든 타자에 대한 시선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대학 시절 학생 운동에 뛰어들어 가투 시를 쓰던 무렵, 이미 그 싹은 시작됐다.


“대학을 들어가서 광주 민주화운동 사진전을 처음으로 봤죠. 담장에 걸린 사진들을 보면서, 내가 전혀 몰랐지만 존재했던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그러면서 급속도로 운동권 학생이 되기 시작했죠. 그때의 경험이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쳤는데, 덕분에 개인을 넘어선 공동체의 의미를 고민하게 됐어요.”


김선우는 뜻 맞는 학생들과 함께 학생 운동 동아리를 조직해서 시를 썼다. 좋은 혁명가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있어도, 시인으로 살겠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던 때였다. 하지만 학생 운동을 하던 시절에도 그의 시에서는 민중문학 특유의 투박하고 날선 언어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순수 문학 동아리보다 더 치열한 의식을 담아내되, 시로 표현되는 언어는 그들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시어로서의 밀도가 있어야 한다는 자의식이 강했어요. 거친 언어로 일관하다 정작 메시지 전달에는 실패한 1980년대 민중 문학의 오류를 답습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가 학생 운동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사회주의 이념이 몰락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 1992년 대학을 졸업할 때는 노동 현장과의 끈도 대부분 끊어져, 현장 활동을 할 길도 없었다. 절실했던 믿음의 대상이 갑자기 사라지자, 그의 마음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모든 상황이 완벽하리만큼 절망적이어서 살아야겠다는 의지조차 사라졌다. 하루는 출가를 생각했고, 그 다음날은 자살을 꿈꾸며 3년을 방황했다. 달리는 기차나 버스를 보면 무조건 올라타야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불안했던 20대 중반, 잠시 몸을 쉬러 간 운문사에서 그는 불현듯 시인이 되리라 결심했다.


“지금도 가끔 그때를 돌이켜보면, 시가 나를 살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뒤로는 2년 동안 밤낮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습작을 했다. 하루에 두어 시간만 자면서 시를 썼고, 시를 쓰면서 먹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돈만 벌었다. 그리고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10편의 시를 게재하며 등단했다.


시, 산문, 소설을 넘나드는 ‘전업 글쟁이’로 살기 

등단한 지 어느덧 10년을 훌쩍 넘긴 요즘, 김선우는 세 번째 시집 첫머리에 중대 발표를 했다. 앞으로 청탁 받아 쓰는 시는 더 이상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제, 지난 10년 동안 써 온 것과는 다른 형식의 발화법을 시도하고 싶다. 오래오래 그의 머릿속에서 무르익어 변화되는 시들이 새로운 언어의 옷을 입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가 필요할 것이다. 그가 완벽하게 홀로 창작하는 시간을 갈망하는 것도 그래서다. 


“산문은 어떻게든 마감 기한에 맞춰 보낼 수 있지만, 시에 마감 기한이 있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거예요. 기한에 맞춰 시를 써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내 속에서 뭔가 충분히 고이고 쌓였을 때 꺼내놓는 시와, 마감에 쫓겨 억지로 끄집어내는 시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을 테니까요.”


시인으로 등단한 이후 다른 직업을 갖지 않는 대신, 김선우는 전업 시인으로 살기 위해 스스로 ‘전업 글쟁이’라 부를 만큼 다양한 글을 썼다. 산문을 쓰는 일이 생계에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시와 산문으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무용가 최승희(1911~1969)의 삶을 다룬 시나리오를 쓰다가, 예상 외로 많은 시나리오의 제약조건에 갑갑증을 느껴 소설 쓰기에 도전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갈무리한 기초 자료를 토대로 올 4월부터 구상에 들어갔고,  8월까지 초고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누구나 한번쯤 이름을 들어봤기에 그만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최승희의 이야기지만, 흔한 전기 소설이 아니라, 전혀 새롭고 낯선 소설로 재구성해볼 생각이다.


“소설 쓰면서 생활 리듬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새벽 6시에 잠들었다가 오후 2시쯤 일어나요. 시는 새벽에 몰아 쓰는 게 가능한데, 소설은 정말 체력 싸움이네요.”


8월 말에는 지난 10년간 각종 지면에 쓴 칼럼 모음집과,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지면에 연재한 시를 모아 출간할 예정이다. 김선우의 새 책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올 가을은 풍성한 계절이 될 듯하다.


상처를 보듬는 몸과 몸

‘아무도 더 이상 시를 읽지 않는 시대’라는 말이 문학계 곳곳에서 비명처럼 들려온다. 하지만 김선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글을 쓴다. 기도하듯 시를 쓰고, 밥을 먹듯 산문을 쓰고, 이따금 간식 먹듯 소설을 쓴다. 시를 쓰는 일이 그에게는 삶이고, 치유다.

“산다는 건 세상에서 부대끼며 상처투성이가 되어 가는 일이에요. 하지만 문학은 그런 상처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어요. 문학은 우리 영혼의 음식 중에서도 가장 질 좋은 음식 중 하나거든요.”


일상의 사물에서 글감을 찾아내고, 그 속에서 사랑할 구석을 찾아내는 시인의 섬세한 눈길은 따뜻하다. 시를 쓴다는 것은 그 대상과 연애하는 일이니, 사랑하지 않고서 좋은 글이 나올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푹 자고 일어나 눈뜬 후에 내가 보는 건, 먹는 것, 만지는 것…. 그 모든 과정 속에 삶의 진리가 있어요. 멀리서 찾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내 속에 다 있거든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눈앞에 보이는 것, 경험하는 것들로부터 글의 영감이 찾아와요.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이 소중하다는 걸 잊고 살죠.”


김선우가 정제한 시어를 통해 그려낸 풍경은 그 어떤 것보다 생명 살림의 의지가 우선시되는 세계다. 파괴와 약탈, 살육의 그림자가 넘실대는 세상에서 뭇 생명의 숨을 지속하게 만드는 힘은, 몸과 몸의 연대에 있다. 김선우는 그 연대의 힘 역시 사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다. 죽어가는 생명이 있을 때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는 마음, 상처 입고 아파하는 것들을 보듬어 되살리려는 마음이 세상을 구원하는 힘의 가장 큰 원천인 것이다.


“'내 몸에서 태어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생명은 살려야 한다'는 본능적 자각이, 결국 내 몸 아닌 다른 몸도 살려 내게 하잖아요? 몸과 몸이 서로를 보살피고 서로의 상처에 손 내미는, 그런 연대가 없다면 지구의 생체 시계도 머지않아 멈추고 말 거예요.”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를 일어설 무렵, 시인이 먼저 작고 가벼운 손을 내밀어 작별인사를 건넨다. 그의 산문집에서 읽었던 한 구절, “악수를 좋아한다”던 문장이 떠올랐다. 악수를 건네면서 그가 마음속으로 ‘힘내요’ 하고 속삭인다는 것도.
어쩌면 그가 누군가와 악수를 나누는 건, 손금처럼 서로에게 뚜렷이 새겨진 상처를 모른 척 보듬는 행동이 아닐까.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생명을 노래부를 때 그러하듯이, 조심스럽게. 그 부드럽고 따뜻한 힘에 김선우 시의 핵심이 있다.


김선우 | 시인. 1970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강원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으며, 2004년 제49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2000), 《도화 아래 잠들다》(2003),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2007)를 펴냈다. 이밖에 산문집 《물 밑에 달이 열릴 때》(2002), 《김선우의 사물들》(2005), 《내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2007), 동화집 《바리공주》(2003)가 있다. 현재 시힘 동인, 실천문학 편집위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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