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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촌 그리는 '철암그리기' 사람들

by 야옹서가 2006. 1. 30.

한때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할 만큼 부유했던 탄광마을 철암. 석탄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떠났지만, 날로 황량해져 가는 탄광촌 풍경을 그림으로 보듬는 ‘다방 갤러리’가 있어 철암도 더 이상 쓸쓸하지만은 않다. 대도시의 어떤 화려한 전시장보다 뜻 깊은, 탄광촌 역전다방 갤러리를 찾아가 본다.

철암역에 내려 밖으로 나가자마자 오른편으로 꺾어들면, 바로 옆으로 따끈한 차 한 잔이 그려진 갈색 간판 ‘진 커피숍’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는 매달 새로운 탄광촌 풍경 그림이 교체 전시된다. 전시된 그림들은 매달 셋째 주 토요일에 철암을 찾는 ‘철암그리기’ 회원들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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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0월 처음 시작된 ‘철암그리기’는 문화활동단체 ‘할아텍’에서 추진해온 문화운동이다. 석탄 산업의 사양화와 함께 소외되어 가는 탄광마을을 개발 일변도의 논리로 없앨 게 아니라, 보존하면서 그 속에서 새로운 문화적 가치를 발견해보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그림 그리기 운동이 바로 ‘철암그리기’다.

서울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내려온 ‘철암그리기’ 회원들이 철암에 도착하면 오후 2시 전후. 각자 뿔뿔이 흩어져 그림을 그리다가, 오후 6시쯤 되면 진 커피숍에 모여 그림을 펼쳐놓고 담소를 나눈다. 철암 천변에서 폐가가 된 빈 건물들을 그리는 사람, 석탄이 산처럼 쌓인 저탄장 풍경을 그리는 사람, 철암 주민들이 키우는 양배추의 생명력에 매료된 사람…. 각자의 개성을 담아 완성된 그림들은 진 커피숍 벽에 걸려, 다음 달 ‘철암그리기’ 날이 돌아올 때까지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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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마을 풍경을 그리려면, 직접 마을 곳곳을 발로 누벼야 한다. 마을 뒤편으로 채탄장이 있어, 석탄이 산을 이룬 장관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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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검은 선으로 윤곽을 묘사한 마을 풍경. 현장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그린 그림이기에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에선 느낄 수 없는 생동감이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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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암에서 그릴 수 있는 것은 석탄산과 철암 천변뿐이 아니다. 그곳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것, 사람과 식물, 동물까지도 모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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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 석탄을 쌓아두고 비닐을 쳐 조심스레 보관하는 동안 사이로 구불구불 난 길을 통해 여러 대의 석탄 트럭이 길 아래로 쉼 없이 석탄을 실어 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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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철암그리기’ 그림이 매달 전시되던 곳은 철암역 내 갤러리였다. 그러나 예전 갤러리가 구내식당으로 개조되면서, 회원들의 아지트였던 진 커피숍이 2005년 8월부터 새로운 전시공간으로 자연스럽게 정해진 것. 갤러리가 별도로 마련된 것도 아니고, 그저 다방 벽에 드로잉을 붙여둔 정도지만, 변변한 갤러리 하나 찾기 힘든 철암 지역에서 이곳은 거의 유일한 전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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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부터 철암역 앞을 지켜온 진 커피숍의 터줏대감 김숙희 씨는 햇수로 5년 넘게 이어진 ‘철암그리기’ 회원들과의 인연을 믿고 상설 전시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어느덧 50대로 접어들었지만 ‘정확한 나이는 비밀’이라고 웃어넘기는 김숙희 씨에게 소중한 건, 그동안 철암에서 정을 붙이고 살아온 추억이다. 그는 나중에 아이들이 크면 커피숍을 보여주며 “엄마가 이런 데서 장사하면서 살았다”는 얘기도 들려주고 추억을 간직하며 살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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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만 해도 철암에 사람들이 많았지. 요즘은 옮겨갈 집을 지어 놓지도 않고 철거 먼저 하라는 게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어요. 시에서는 보상만 해주면 다 된다고 생각하나봐. 보상이 다는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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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석탄 산업 합리화 정책 이후 탄광들이 줄줄이 폐광되면서, 철암 역시 쇠퇴 일로의 길을 밟아 왔다. 하지만 개발 논리로 삶을 재단하기보다 현재 모습을 보듬고 그 속에서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려는 사람들이 있기에 쇠락해 가는 철암도 더 이상 쓸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뭔가를 그린다는 말은 그리움과 동일한 어원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태백 철암에서 매달 셋째 주 토/일요일 진행되는 ‘철암그리기’ 운동에 동참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할아텍(www.halartec.com)에서 신청할 수 있다. 화가는 물론, 일반인도 자유롭게 참여 가능하다. 입으로만, 개념으로만 하는 예술이 넘쳐나는 시대에 그리운 대상을 보고 그리는 사생의 매력을 새롭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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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암그리기 회원인 이혜인 씨가 저탄장을 오르고 있다. 길바닥마저 모두 까맣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이 초록 비닐로 덮인 석탄 무더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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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탄장에 도착하면, 가장 그리고 싶은 대상을 골라 자리를 정하고 그림을 그린다. 찬바람에 손이 곱아도, 철암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추위도 잊고 몰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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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으로만 하는 예술, 머리로만 하는 예술이 넘쳐나는 시대에 그리운 대상을 직접 어루만지는 사생의 매력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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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탄 운반 트럭이 길을 내고 지나간 바퀴 자국이 구불구불 길을 다져 놓는다. 비가 내린 뒤에는 석탄 가루가 뒤섞인 땅바닥이 질퍽질퍽해져, 늪을 연상시키는 점성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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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암 천변에는 강 위에 가느다란 다리를 세워 필로티 공법으로 지은 독특한 건축물들이 이채롭다. 저 멀리 보이는 초록 비닐 산이 저탄장의 규모를 실감하게 한다.

태백 = 고양의 프리랜서 기자 2006년 1월 30일 (월) 10:45 미디어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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