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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함과 진실함’을 추구한 화가를 키운 곳-강원 양구군 박수근미술관

오래된 돌담처럼 질박한 느낌의 유화로 사람들을 그렸던 화가 박수근. 향토색 짙은 그림에는 한국전쟁 이후 고난의 시기를 묵묵히 견뎌온 세대의 삶이 서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화가의 생가 터인 강원 양구군 양구읍 정림리에 자리 잡은 박수근미술관은 그러한 화가의 정신을 이어가면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 주민들과 함께하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2002년 10월 개관한 박수근미술관은 외관부터 여느 미술관 건물과는 다르다. 불규칙하게 잘라낸 화강암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외벽은 화가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투박한 질감을 그대로 옮겨냈다. 멀리서 보면 미술관 외벽 전체가 마치 화가의 그림을 커다랗게 확대한 것처럼 느껴진다. 건축가 이종호 씨가 설계한 미술관 건물은 박수근의 회화에 담긴 화강암의 질감을 건축 미학으로 승화시킨 점을 높이 평가받아 2002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에 소개되기도 했다. 화강암으로 소박하게 단장한 미술관 외벽 옆으로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낮은 돌담이 이어지고 있다. 여느 미술관은 관람객이 입구로 바로 진입할 수 있도록 동선을 고려해 설계하지만, 박수근미술관은 오히려 입구까지 도달하는 길을 빙 돌아가게끔 만들어 시간을 지연시킨다. 관람객이 미술관 입구까지 산책하듯 천천히 걸으며 박수근과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끔 설계한 것이다.


돌담길을 타박타박 걸어 미술관 앞까지 다다르면 미술관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는 박수근 동상과 마주하게 된다. 이 역시 여느 기념비적인 동상과는 다른 모습이다. 실물보다 약간 더 큰 동상은 가만히 무릎을 감싸안고 미술관 입구를 바라보고 있다. 바로 옆에 살며시 놓아둔 화구를 집어 들고 일어설 것처럼 친근하다. 미술관 앞에는 화가의 그림속 빨래터를 재현한 듯한 실개천이 흐르고 있어 운치를 더한다.

 

박수근이 창작의 원천으로 삼았던 고향, 양구
박수근미술관이 터를 잡은 강원 양구군은 남북을 모두 아우른 우리 국토의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어‘ 한반도의 배꼽’으로 불린다. 그중에서도 화가의 고향 마을이 있는 정림리는 해발 1198.6m의 사명산이 든든하게 마을을 받쳐주고, 마을 앞으로는 서천西川이 흐르는 고즈넉한 산골이었다. 강원도의 맑고 깨끗한 자연을 놀이터 삼아 자라난 산골 소년 박수근이 늘 보았던 것도 화려한 도시가 아닌 고향의 산과 들판, 나무와 시냇가 같은 자연 풍경이었다.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한 그에게 창작의 원천이 되어준 것은 때 묻지 않은 양구의 자연이었던 셈이다.


박수근의 그림에서 무채색에 가까운 차분한 색감의 유화물감을 겹겹이 쌓아올려 만든 우둘투둘한 그림 표면은 고향의 흙과 바위를 닮았고, 굵고 힘 있는 선으로 단순화된 인물 군상은 그가 매일같이 보며 자란 가족과 순박한 이웃의 얼굴이었다. 고향을 떠나 춘천에서 자취생활을 할 때도, 문화의 중심지인 서울로 상경해 작품 활동을 할 때도 박수근의 뇌리에 남은 그 영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박수근의 그림이 태어난 배경을 이야기할 때 고향인 양구에서의 기억을 떼어놓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양구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열두 살 때 농민화가 밀레의 원색 도판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박수근. 그는 이미 그 무렵부터 홀로 학교 뒷동산에 올라 커다란 느릅나무를 그리며 마음을 달래곤 했다. 어렸을 때나 어른이 되어서나 그가 즐겨 그린 대상은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목裸木이었다. 너무 일찍 삶의 고단함을 알아버린 소년은, 힘겨웠던 그 시절 자신의 마음 풍경과 꼭 닮은 말라붙은 나목을 바라보며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상급학교로 진학하지는 못했지만, 일찍이 겪은 인생의 고난은 낮은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행상을 나선 여인들, 일하러 나간 엄마 대신 동생을 업어 키우던 소녀, 일자리를 찾아 거리로 나와 쭈그려 앉은 중년 사내 등 박수근이 그린 인간 군상은 고난 속에서도 의지를 잃지 않고 삶을 견뎌낸 사람들이었다.

 

박수근은 예술가란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한 인터뷰에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고 밝힌 것은, 그렇게 평범한 우리네 이웃과 가족의 모습 속에 자신이 찾는 선함과 진실함이 담겨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의 혼란기, 한국전쟁 등 격동의 시간을 견디며 묵묵하게 살아온 서민의 삶을 정감 어린 그림체로 표현해냈기에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박수근의 그림은 널리 사랑받는 게 아닐까.

 

화가의 삶을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기념관과 전시관
박수근미술관은 그런 화가의 정신을 오롯이 담은 곳이다. 1층 기념전시관에서는 박수근의 삶을 요약한 영상물을 상시 상영하면서, 화가의 일생에서 중요한 순간을 담은 사진과 관련 인물들의 글로 벽 한 면을 장식하여 화가의 삶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기념전시관에는 화가가 생전에 쓰던 안경과 돋보기 등의 유품을 비롯해 기증받은 유화 소품‘ 비둘기’와‘ 굴비’, 화가가 평소 그렸던 연하엽서 등도 함께 전시되어 눈길을 끈다. 제1기획전시실 한쪽에 마련된 상설전시 작품을 통해 서민적인 풍경을 즐겨 그린 박수근의 작품 세계를 살필 수 있다. 유화 소품이나 수채화 등의 그림 외에도 올록볼록한 질감이 있는 물체 위에 종이를 대고 연필 등으로 문질러 질감을 옮겨내는 프로타주(frottage) 기법을 표현한 소품 등에서, 박수근이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면서도 다양한 실험을 거듭했음을 볼 수 있다.

 

미술관 밖 옥외 휴게공간 입구를 거처 뒷산으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화가 부부가 합장된 묘소로 가는 길이 이어진다. 호젓한 산길을 따라 십여 분쯤 걸으면 아담한 봉분이 눈에 들어온다. 중매결혼이 대세였던 당시, 낭만적인 연애편지를 보내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화가는 사후에도 가장 사랑했던 아내와 함께 잠들었다. 부부의 묘를 지키는 그림 비석에는‘ 서민화가庶民畵家박수근朴壽根기념비記念碑’라는 글귀와 함께, 아내가 가장 좋아했다는‘ 아기 업은 아낙’의 드로잉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박수근미술관과 박수근 마을까지 두루 둘러보았다면, 미술관에서 자동차로 6분 정도 거리에 있는‘ 박수근 나무’도 찾아가보자. 현재 양구교육지원청이 자리 잡은 자리가 바로 박수근이 학창시절을 보낸 옛 양구보통학교 부지인데, 이곳에는 박수근이 화가를 꿈꾸던 시절 틈틈이 즐겨 그렸다는 수령 300여 년의 느릅나무 두 그루가 아직도 건재하다. 어린 시절의 박수근이 뒷동산에 올라 앙상한 나뭇가지를 꼼꼼한 손길로 그려냈던 그 모습을 떠올리며, 화가의 대표작 속에 남겨진 나목의 원형을 상상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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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가 사랑한 고향, 안좌도 청자색 그 바다-전남 신안군 김환기 생가 마을

 



한국 근대회화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김환기 탄생 100주년을 앞두고, 화가가 유년시절을 보낸 전남 신안군 안좌도의 생가 마을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읍동항에서 1km 남짓 떨어진 김환기 생가까지 향하는 길목마다 벽화와 조형물로 태어난 김환기의 작품세계를 접할 수 있다. 예술의 섬으로 거듭난 안좌도를 돌아본다.


이른 봄의 안좌도 앞바다는 고려청자 빛이다. 연두색이라기엔 흐리고, 회색이라기엔 푸른 오묘한 빛깔. 읍동항 선착장에 닿자마자‘ 이건 김환기의 바다다’ 싶었다. 김환기가 영원을 상징하는 구름, 학, 사슴,달항아리 등의 소재들을 화폭에 옮겨 넣을 때 즐겨 칠한 바탕색도 이렇게 은은한 회녹색과 회청색이었다. 썰물 때면 갯벌이 바닥을 드러내고 밀물 때면 찰랑찰랑 차오르던 이 바다에서 뛰놀며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화가의 붓에 담긴 은은한 색감에 고향의 오묘한 바다색이 배었을 것은 당연했다. 이제야 그 빛깔이 어디서 왔는지 알겠다. 어린 시절, 화가의 뇌리에 또렷이 각인된 바다는 그렇게 그리운 옛 도자기의 빛깔이었으니 말이다.

승선권 매표소 겸 매점에도 김환기의 점묘화에 등장하는 깨알 같은 점들이 알알이 그려져 있고, 간이 여객대기실 안에도 김환기 그림벽화로 가득 차 있으니 여기가 바로 김환기의 고향이란 게 비로소 실감난다. 돌아가는 배 시간부터 먼저 확인하고 선착장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본다. 여기서부터 읍동리의 김환기 생가까지는 1㎞ 남짓. 타박타박 걸으며 화가의 고향을 돌아보기에는 적당한 거리다.


배 위에서도 또렷이 보이던 대형 벽화 1점은 김환기의 대표작‘ 항아리와 여인들’(1951)의 부분도를 제법 그럴듯하게 옮겨놓은 모습이다. 여인들이 품에 소중히 안거나 머리에 인 백자를 바라보노라니 김환기의 도자기 수집 취미에 얽힌 일화가 떠오른다. 1944년 김환기와 재혼하여 평생의 반려가 된 김향안의 수필집‘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는다’에는 다음과 같은 회고담이 나온다. 화가가 1944년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까지 매일 사 모으다시피 한 도자기가 성북동 집에 가득했다는 대목이다.
 

“김환기가 좋아한 것은 자기 팔로 안아서 한아름 되는 유백색乳白色 대호大壺와 청백살(淸白피부)의 큰 항아리들이었다. 때로는 마당에 내다가 육모초석(六角礎石)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며 뙤약볕을 피해서 그늘에 옮겨놓고. 그 항아리들은 김환기에 있어 살아 있는 생명체와도 같았다.”

 

오래된 도자기는 세월을 담고 있다. 사람의 목숨은 고작 100년 안팎이지만, 수백 년 전 어느 도공이 혼을 실어 빚은 도자기의 수명은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났을 때 사람의 한평생을 훌쩍 뛰어넘는다. 김환기가 그렸던‘ 영원한 것들’의 목록에서 도자기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화가가 모은 도자기들은 한국전쟁의 참화를 피해가지 못했다. 부산으로 피난 가기 전, 딴에는 안전히 보관하느라 우물에 던져 넣었던 도자기들을 나중에 건져 보니 모조리 깨져 있었단다. 참담했을 화가의 마음은 지금도 헤아릴 수 있겠다. 아끼던 도자기를 되살릴 수는 없었지만, 김환기는 이를 그림 속에 그려 넣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었다.

담벼락 따라 고요히 흐르는‘ 영원의 노래’
‘항아리와 여인들’이 그려진 건물 옆의 비료창고에는 1958년작‘ 사슴’이 그려져 있다. 김환기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있던 시절, 당시 홍익대학교 도서관장이던 미술평론가 고故 이경성 씨의 방이 적적해 보인다며 선물로 주었던 그림이다.‘ 우정의 증표’로 화가의 손을 떠났던 사슴 그림은 이렇게나마 화가의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화가가 영원의 상징으로 여겼던 사슴의 이미지는 선착장에 설치된 4개의 사슴 동상부터 김환기 공원의 타일벽화, 생가 맞은편 주택에 그려진 벽화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모습을 바꿔가며 등장한다. 김환기 생가를 찾아가는 길목에 몇 마리의 사슴이 등장하는지 헤아려보는 것도 화가의 고향에서 찾는 또 다른 재미겠다.


전남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에 위치한 생가 마을로 접어들면 심심할 겨를이 없다. 한전 안좌출장소에서부터 화가의 생가까지 2차선 도로를 따라 늘어선 건물 벽에 김환기의 그림들이 드문드문 그려져 있어서다. 화가의 고향이‘ 2010마을미술프로젝트’ 시행지로 선정되면서 생긴 변화다. 마을미술프로젝트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마을미술프로젝트 추진위원회와 (사)한국미술협회가 공동주관한 공공미술 프로젝트이다. 특히 화가의 생가 맞은편에 있는 대여섯 채의 주택에는 화가의 대표작‘ 영원의 노래’에 등장하는 구름과 달, 도자기 등이 가로로 길게 그려져 있어 장관을 이룬다.

읍동리에서 천석꾼 부자로 유명했던 화가의 부친은 멀리 백두산에서 자란 적송을 가져다가 1926년 지금의 생가를 지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생가는 북방식 ㄱ자형 한옥의 안채로 66㎡(20평) 정도의 아담한 규모인데, 1950년대 이후 화가의 친척이 거주하다 1970년대 신안교육청이 매입해 안좌초등학교 관사로 이용했던 덕분에 건물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었다. 신안군에서 1999년 생가를 매입하고 2006년 정비를 완료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선보였다고 한다.


다만 생가에서는 화가의 체온이 담긴 유품이나, 하다못해 조그만 스케치 원화조차 볼 수 없는 점이 아쉽다. 이미 서울 부암동에 화가의 이름을 딴 환기미술관이 있는 데다, 만만찮은 그림 가격 탓에 화가의 원화를 구매하기가 어려우리란 것은 짐작이 간다. 화가의 원화를 볼 수는 없지만, 안좌도를 일본의 나오시마 같은‘ 예술의 섬’으로 조성하고자 하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2008년부터 안좌도에서 매년 열리는 김환기국제미술제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화가가 태어난 예술의 고향을 기리는 세계 예술가들이 모여 전시도 하고 창작도 한다니 미술제전이 열리는 무렵 섬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또한 2013년 완공을 목표로 읍동리 치동저수지 인근에 130억 원을 들여 김환기 미술관을 건립 중이라고 하니, 미술관 완공 이후 사뭇 달라질 화가의 고향을 기대해본다.


고향의 자연을 사랑했던 김환기

김환기의 생가는 소나무가 우거진 안산에 둘러싸여 있다. 녹음이 우거진 풍경을 사랑했던 그는“ 순하디순한 마을 안산案山에는 아름드리 청송이 숨막히도록 들어차 있다”고 회상하면서“ 고향 생각은 곧 안산 생각뿐”이라고 털어놓았던 바 있다. 얼마나 나무를 사랑했던지 화가는 자신만의 아틀리에를 꿈꿀 때도“ 창을 열어젖히면 푸른빛이 눈에 들어올 수 있는 정도의 정원, 그래서 내가 구상을 하며 거닐 수 있는 그런 집을 하나 꼭 갖고 싶다”고 했었다. 복잡한 현실에서 눈을 돌려 다른 곳을 향했을 때 자신의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 한 그루의 싸리나무”이길 바랐던 남자.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아호雅號를 정할 때도 평소 좋아하던 한자인‘ 나무 수樹’자를 먼저 고르고 이에 어울리는 글자를 한참 뒤에야 붙여서‘ 수화樹話’라는 단어를 완성했다고 한다.

김환기의 생가가 자리 잡은 풍경을 멀리서 조망해보고 싶어 생가 맞은편의 산길을 오른다. 흙바닥이었을 마을길은 대부분 콘크리트로 다시 포장됐지만, 생가 주변의 가옥에는 예스러운 돌담길이 남아 있어 운치를 더한다. KT안좌중계소로 이어지는 호젓한 산길 오른편으로는 편백나무가 훌쩍 큰 키를 자랑하며 줄지어 서 있다. 봄비에 촉촉이 젖은 편백나무 숲을 거닐며 나무를 사랑했던 화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큰 화가가 되리라는 부푼 꿈을 갖고 고향을 떠난 청년 시절의 화가에게 안좌도는 좁기만 한 곳이었으리라. 그가 회상한 고향 풍경은 이런 것이었다.

 

“내 고향은 전남 기좌도. 고향 우리 집 문간에 나서면 바다 건너 동쪽으로 목포 유달산이 보인다. 목포항에서 백 마력 똑딱선을 타고 호수 같은 바다를 건너서 두 시간이면 닿는 섬이다. 그저 꿈같은 섬이요, 꿈속 같은 내 고향이다.(…)친구들이‘ 자네 고향섬이 얼마큼 크냐?’고 물으면‘ 우리 섬에선 축구놀음은 못 한다’고 대답한다. 공을 차면 바다로 떨어질 것 같기 때문이다.”

 

다소 익살스러운 과장이 곁들여지기는 했지만, 당시만 해도 배를 타고 두 시간을 가야 육지에 닿을 수 있었던 작은 섬 안좌도(옛 기좌도)에 대한 화가의 인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대미술의 세례를 받을 수 있었던 일본으로, 파리로, 뉴욕으로 떠돌며 예술혼을 불태웠던 김환기였지만, 결국 그의 마음이 가장 편안했던 곳은 고국의 자연이었고, 고향의 안산 아래가 아니었을까. 생가 마을의 벽화를 돌아보는 길에 발견한 화가의 자필 편지 한 장을 읽다가, 고향을 그리던 노화가의 애틋함이 느껴져 마음이 애잔해진다. 타일벽화로 재현된 이 편지는 안좌도의 친척에게 보낸 것으로 1971년 8월 17일자 소인이 찍혀 있다. 편지 내용의 일부를 옮겨본다.

“(…)고향故鄕소식을 들으니 반가웁기는 하니 서글픈 생각뿐이요. 서울보다도 고향故鄕이 보고 싶어 빨리 귀국歸國하고도 싶으나 외국外國에 나와 살다보니 자연 늦어만 집니다. 허나 명춘明春에는 한번 나가야 될 것 같애요.”


편지는 고향 마을로 돌아왔건만, 화가는 3년 후인 1974년 타향 만리에서 별세할 때까지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이른바‘ 뉴욕 시기’로 불렸던 1963년 이래 작고하기 전까지 뉴욕에 체류하면서 창작한 수많은 점묘화를 가리켜 혹자는 마천루의 불빛 같다 하고, 혹자는 밤하늘에 가득한 별빛 같다 했지만, 사실 그가 점점이 그린 형상은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자 그리운 자연의 일부였다.


화가의 생가를 뒤로하고 읍동항으로 향한다. 압해도 송공항과 읍동항을 왕복하는 농협 페리를 타면 2010년‘ 떠도는 미술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그려진 김환기의 작품들이 선실 내외에 재현된 모습도 볼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김환기의 초기작‘ 론도’(1938)를 갑판에서 감상할 수 있는 만큼, 시간 맞춰 타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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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귀 끝부터 꼬리까지 흐르는 매끄러운 곡선은 그 자체만으로 유혹적이다. 도예가 김여옥 씨는 고양이 몸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선에 반해 고양이의 모습을 흙으로 빚기 시작했다. 유혹을 상징하는 화려한 양귀비꽃을 곁들여서. 그래서 그의 작업실 이름도 파피캣(poppycat)이다.

종로구 계동의 한 갤러리에서 열린 김여옥 씨의 전시를 찾아가자, 한옥을 개조해 만든 아담한 전시 공간 안팎으로 검은 고양이들이 와글와글하다. 기와를 얹은 담벼락에 몸을 누이고 낮잠 자는 녀석, 나비를 잡느라 까치발로 뛰는 녀석, 창 너머를 고요히 바라보는 녀석. 고양이 털빛은 하나같이 검은 듯 푸르고, 잿빛인가 싶다가도 은빛을 띤다. 따스하면서도 서늘한 기운이 도는, 딱 잘라 무엇이라 규정하기 힘든 색이다.  

잿빛인 듯, 은빛인 듯 은은한 러시안 블루
“고양이 작업의 첫 모델이 된 아이가 러시안 블루 고양이였어요. 처음 봤을 때 몸의 선이나 빛깔이 너무 예쁜 거예요. 감자떡 빛깔 아시죠? 딱 그 색이었어요. 그래서 고양이 이름도 감자떡을 줄여서 ‘감자’라고 부를 정도였어요.”

 감자와 함께 살기 전에는 얼룩무늬 고양이 ‘땅콩’과 ‘오이’를 키웠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고양이를 모델로 작품을 만들 생각은 못했다. 그러나 5년 전쯤 집에 들인 셋째 고양이 감자는 그에게 영감을 주는 소중한 모델이 됐다. 본격적으로 고양이를 빚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부터다.

대학원 재학 시절 그는 라꾸(raku) 기법을 즐겨 사용했다. 가마에서 기물을 구워 약 1000℃가 될락 말락 할 무렵, 뜨거운 상태의 기물에 톱밥을 뿌리고 연기가 스며들게 하는데, 이런 과정을 ‘연(煙)을 먹인다’고 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기와도 ‘꺼먹이 소성’이라고 해서 라꾸와 비슷하게 연을 먹이는 건데요. 라꾸와 꺼먹이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연을 완전히 흡착시키는 방식이에요. 그러려면 기물의 기공이 열려 있어야 하는데, 뜨거울 때 꺼내야 해서 연기가 굉장히 많이 나요. 그래서 서울 시내에서, 그것도 지하 작업실에서 라꾸 작업을 하기는 어렵죠. 대학원 졸업 후에 라꾸와 비슷한 느낌을 낼 방법을 고민하다가, 고온 소성이 가능하면서도 원하는 색을 낼 수 있는 산화물을 찾았어요.”

 

이렇게 신비로운 빛깔의 검은 고양이는 어떤 과정을 거쳐 태어날까. 상수동에 위치한 작업실로 자리를 옮긴 김여옥 씨가 시범을 보인다. 습기가 마르지 않게 비닐봉투에 담아둔 흙을 돌판 위에 펼쳐 여러 번 치대고 밀대로 밀어 일정한 두께로 편 다음, 모눈종이에 그린 기본 도안을 흙반죽 위에 얹고 고양이의 실루엣대로 윤곽을 도려내어 손으로 가장자리를 매끈하게 다듬는다. 고양이의 근육과 표정을 생각하며 조형하는 이 과정을 작가는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다. 가마에 굽는 소성 작업이 남아있다.

 


그의 작업실에는 큰 가마와 작은 가마가 각각 하나씩 있다. 큰 가마에는 본 작품을 굽고, 작은 가마는 ‘시편(試片) 가마’라고 해서 구워진 흙의 빛깔이나 유약 색을 시험할 때 쓴다. 작업실 개수대 위로 나란히 걸린 알록달록한 시편들은 다양한 유약 시험의 결과물이다. 그는 기물 원형에 금이 가거나 휘어지지 않는 한, 10번이건 20번이건 유약을 다시 칠해서 원하는 색깔이 나올 때까지 굽는다고 한다. 유약이 겹쳐지면서 밑에서 색이 올라오는 효과 때문에 더 다양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묵직한 뚜껑을 위로 들어 올리니, 우물처럼 깊고 넓은 가마 속에 살구색 피부의 고양이가 한 쌍 잠들어 있다. 초벌구이여서 아직 색이 입혀지지 않은 상태다. 반죽 상태의 거무죽죽한 흙이 구워지면 이렇게 산뜻한 빛깔로 변한다.

언제나 꿈꾸는 고양이
김여옥 씨가 만든 고양이에게서는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찾아볼 수 없다. 대부분 뒷모습이거나, 정면에서 본 모습이 있어도 꿈꾸는 듯 눈을 감고 있다. 그가 고양이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인 눈동자를 묘사하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고양이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눈이래요. 반짝이는 고양이의 눈을 보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여기거나, 심지어 사악해 보인다고까지 말하는 게 안타까웠어요.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사람도 친근감을 갖게 하려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고양이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바람 냄새를 맡을 때의 모습을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그럴 때의 고양이는 바람 속에서 뭔가 정보를 얻는 것 같기도 하고, 사색하는 느낌도 들잖아요. 굳이 눈을 표현하지 않아도 고양이의 몸 자체가 워낙 선이 아름다워서, 그런 실루엣을 강조한 작품을 만들었죠.”
 
다섯 마리 고양이가 가르쳐 준 가족의 의미
김여옥 씨는 땅콩, 감자, 오이를 떠나보내고 현재 고구마, 누룽지라는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다. 처음에는 고양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어느새 작품의 모델로까지 삼게 된 작가는,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 살았던 다섯 마리 고양이들이 전해준 깨우침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다. 시어머니가 고양이와 함께 한 시간을 담으라며 선물해준 ‘육묘앨범’에는, 그와 함께 부대끼던 고양이들의 성장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뭉클하다. 김여옥 씨는 고양이에게서 빠진 젖니까지도 고이 앨범 속에 붙여두었다.  
  
“책임져야 할 대상이 생길 때 사람들은 좀 더 힘을 내서 살잖아요. 그전까지는 고양이에게 짜증도 내고 화낼 때도 있었는데, 새로운 아이를 만나고 또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후회도 많았고 많은 것을 배웠어요. 오이, 땅콩, 감자를 보내고 나서 저도 많이 성숙해진 것 같아요. 내가 애정을 쏟고 관심을 주는 만큼, 그들도 그만큼 내게 사랑을 주고 웃게 만들어준다는 걸 알았어요.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해도 만들 수 없는 게 가족이잖아요. 가족은 인연인데, 그런 가족을 만들어준 인연이 참 소중하죠.”

고양이에게 날개를, 고양이에게 자유를
흙으로 고양이의 실루엣을 빚어내는 작업을 계속하는 동안, 작품에도 변화가 생겼다. 고양이 홀로 있던 작품에 ‘창’이 추가된 것이다. 창밖의 세계를 그리운 듯 바라보는 고양이를 만드는 작가에게, 창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계선인 동시에 다른 세상과 통하는 문이기도 하다. 고양이 특유의 호기심과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이 네모난 창 하나에 고스란히 담긴다.

또 다른 변화는 먼 곳을 그리운 듯 바라보기만 하던 고양이의 등에 날개가 솟아났다는 점이다. 꿈꾸는 고양이의 몸에서 둥실 솟아나는 상상 속의 날개는, 깃털이 아닌 양귀비 꽃잎으로 만들어진 금빛 날개다.  

“양귀비도 야생화이기 때문에 길고양이 같은 야생의 자유로움을 상징하는 면도 있고요. 또 호기심 많은 고양이에게 날개가 생기면 얼마나 큰 힘이 되겠나 싶기도 해요. 가고 싶은 곳도 자유롭게 갈 수 있고, 위험하면 빨리 숨을 수도 있고. 그런 고양이의 꿈을 이뤄주고 싶어요.”


  1. BlogIcon misszorro
    2010.12.17 10:47 신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모습은 어떤 일이든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것 같네요
    상상력도 실력도 정말 멋지신 분이네요^^

    • BlogIcon 야옹서가
      2010.12.17 20:5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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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자체도 멋있지만 설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많이 달라지더군요.
      고양이들이 실제로 나들이 나온 것처럼... 창작하는 분들을 찾아뵙다 보면 많이 배우게 됩니다.

  2. BlogIcon 입질의추억
    2010.12.17 10:52

    잘 구경하고 갑니다 ^^

    • BlogIcon 야옹서가
      2010.12.17 20:5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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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다양한 작품과 작가분들을 소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는 다른 글보다는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자극이 되어서 좋아요.


  3. 2010.12.17 10:53

    비밀댓글입니다

  4. 미첼
    2010.12.17 11:27

    고경원님을 몰랐을때부터 '예술가의 고양이'는 즐겨 보고있었어요.
    책광고 메일 구석에서 발견한 귀중한 고양이 이야기, 반가운 맘에 읽고, 공감하고, 댓글도 쓰고 그랬더랬죠. 그 글을 쓰신분이 고경원님이였다니ㅎㅎ
    새삼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네요^^

    • BlogIcon 야옹서가
      2010.12.17 21: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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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12회 연재하기로 하고 이제 1회 남았네요. 블로그에는 소개하지 못한 글도 있고해서
      틈나는 대로 올리고 있습니다. 웹진에 올라온 글을 보셨군요. 고맙습니다.

  5. 유리동물원
    2010.12.17 11:29

    멋진 분이네요. ^^

  6. BlogIcon 새라새
    2010.12.17 11:50

    저렇게 이쁘신 분이 만드시는 거라면 다 이뻐 보이지 않을까요 ㅋㅋㅋㅋ
    정신 모차리는 새라새랍니다.....므튼 머리만 길면 다 여자죠 ㅎㅎㅎㅎ

    • BlogIcon 야옹서가
      2010.12.17 21:0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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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도 멋지지만 미인이기도 하시죠^^ 그냥 아름답다고만 하기보다는
      그분 특유의 매력이 있기에 더 오래 인상에 남았던 것 같습니다.

  7. 비비안과함께
    2010.12.17 23:28

    소개해주신 작가분들 작품이 저마다 개성도 강하고 어느 것하나 멋지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개인적으로 전 김여옥 작가님의 작품이 가장 가슴에 많이 와 닿네요^^언젠가 기회가 되면 실제 전시회에 가보고 싶어요. 제가 느끼는 고양이의 이미지나 정서를 가장 비슷하게 느낄 수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신기한게 작가들이 분명 모두 고양이를 보고 작품활동을 하는데 작품마다 다 전해지는 정서가 전혀 다르다는게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하고...어떤 분의 작품에는 장난끼나 즐거움이 느껴지고 어떤 분의 작품에서는 애잔함고 쓸쓸함이 느껴지고 또 어떤 분의 작품에서는 혼자이지만 외롭지는 않고 뭔가 손닿지 않는 듯한 정서가 느껴지고...

    • BlogIcon 야옹서가
      2010.12.18 20:0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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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고양이를 테마로 작업하면서도 서로 바라보는 매력이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어떤 고양이는 사랑스럽고, 어떤 고양이는 묵직한 생각거리를 주고, 어떤 고양이는
      인간과 참 많이 닮아있기도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양하게 넓힐 수 있어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좋았어요.^^

  8. BlogIcon 권양
    2010.12.19 16:09

    자연과 자유를 갈망하는 날개달린 고양이를보며 맘이 참 아파옵니다 ㅠ,ㅠ
    저희집 누피할배도 원래는 산책묘였는데..이곳으로 이사를온 뒤 크게 다쳐서 방고양이가 된지
    꽤 되었거든요..지금도 가끔 바깥을 뚫어져라,,보는데 참..맘이 ㅜ,ㅜ 에효..
    그래도 이젠 노년의 생활을 여유롭게 집안이지만 편하게 살다갔음 하는 바램이 크다죠^^
    멋진 도예가 분 이시군요^^앞으로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셨음 합니다.편한 주말되셔요~

    • BlogIcon 야옹서가
      2010.12.20 09:0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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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구 어쩌다가 다쳤을까요.. 누피할배도 이제 나이가 어느 정도 있으니
      몸을 조심조심 잘 간수해야 할 나이이지요. 겨울 내내 건강 관리 잘해서
      다시 씩씩한 고양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길고양이를 향한 따뜻한 응원 감사드려요~ 문의사항은 catstory.kr@gmail.com로 메일 주시면 확인 후 회신해 드립니다.


도예가 조은정의 작업실은 2곳이다. 남들은 하나도 갖기 어려운 작업실이 2곳이라니. 한데 그가 작업을 두 군데서 하는 데는 사정이 있다. 여느 도예가들과 달리, 조은정의 작업실에는 가마가 없다. 대신 집에 가마를 뒀다. 지금 쓰는 작업실 공간이 협소한 편이라, 공방 겸 작업실로 쓰는 곳에선 수강생을 가르치거나 초벌구이한 기물에 그림을 그려 넣는 작업을 하고, 가마에 굽는 마무리 작업만 집으로 가져가서 한다. 가마에 불을 때지 않을 때면, 고양이들이 전망대 삼아 창밖을 보는 캣타워로도 쓴다. 가마를 보호하는 철제 앵글에 마끈을 감아 발톱긁개를 만든 모습은, 고양이와 함께 사는 도예가의 작업실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조은정은 고양이를 키울 수 없던 10대 시절 때부터 차근차근 ‘고양이 가족계획’을 세웠다. 흰 고양이, 검은 고양이, 검은 줄무늬 고양이, 노란 고양이. 이렇게 4마리로 1세대 구성이 끝나면 5~6년 터울을 두고 2세대 고양이를 그만큼 데려올 계획이었다. 나이 든 고양이들이 언젠가 떠나도 쓸쓸하지 않게, 마음의 보험 같은 의미로. 하지만 가족계획이란 게 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어서, 1997년부터 한 마리씩 데려온 고양이가 11마리로 늘었다.

어떤 이는 조각보를 만들거나 십자수를 놓으면서 마음을 비운다는데, 그는 고양이를 돌보며 시름을 잊은 모양이다. 1997년 첫 고양이 양양을 들일 무렵이 그에게는 가장 힘겨운 때였다. IMF로 아버지 사업이 잘못되면서 가족도 뿔뿔이 흩어졌고, 집도 없이 언니와 단둘이 서울에 남겨졌다. 일주일을 남의 집 신세를 지다 간신히 머물 곳을 구했지만, 살 이유를 잃은 사람처럼 멍하기만 했다. 그 무렵 데려온 고양이가 양양이다.

“언니 친구 아버지가 대문 옆 쓰레기 더미에 버려진 새끼 고양이를 몰래 꺼내오셨대요. 가족이 다 반대하는데, 마침 딸 친구 동생인 제가 고양이를 좋아하니 이리로 보낸 거죠. 그렇게 양양과 처음 만났어요. 근데 고양이가 생기니까 밥이랑 모래를 사야 되잖아요. 그제야 회사에 나가고 일을 하는 의미가 생겼어요.” 

원하는 색깔과 무늬별로 고양이를 입양하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가족계획도, 양양의 입양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가동됐다. 1998년 2월 모란장에서 사온 둘째 고양이 메이, 역시 모란장 약고양이 장에서 “산 채로는 안 판다”는 걸 우겨서 사온 셋째 나오미, 하이텔 고양이 소모임의 입양란 담당자로 있던 시절 인연이 닿아 입양한 넷째 야로까지 4마리로 1세대 구성을 마치려던 무렵, 예기치 않은 업둥이가 들어왔다. 젖소무늬 고양이 잭, 일명 재구다.

철저히 가족계획에 입각해 고양이를 들였던 만큼, 예정에 없던 잭은 구조 후에 바로 입양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병원에서 검진해보니 시신경이 거의 망가졌다는 말에 결국 다섯째로 떠안았다. 잭은 녹내장이 심해져 1년도 지나기 전에 오른쪽 안구를 적출했고, 시력이 없던 왼쪽 눈도 10살 무렵 적출 수술을 받았다.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잭은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사고를 겪거나 장애가 있는 고양이라고 해서 모두 트라우마에 시달리진 않아요. 잭은 스스로를 불쌍하다 여기거나, 앞을 못 본다고 괴로워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이 정도 큰일도 겪었는데, 그보다 가벼운 일에는 타격을 받지 않아’ 하는 고양이로 자라줬거든요.” 

양양부터 잭까지 5마리가 1세대 고양이였다면, 6년의 터울을 두고 얻은 2세대 고양이는 6마리다. 나오미가 6살 때 낳아준 동고비와 싱그람, 들고양이였던 노랑둥이 소목과 턱시도 무늬의 ‘개냥이’ 브즈, 여신 같은 외모를 자랑하는 호리호리한 2대 야호, 어른이 되어서도 절대동안을 자랑하는 오동이까지. 가족에게서 독립한 지 오래지만, 집에 들어서면 반겨주는 고양이 가족 덕분에 쓸쓸하지 않다.  
 

그가 만든 작품 중에는 화려한 채색 작품도 있지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검은 고양이 그림이다. 어둠 속에 고양이 실루엣만 보일 때도 함께 사는 사람은 어떤 고양이인지 단번에 알아차리는 것처럼, 검은색만으로 11마리 고양이의 기억을 풀어낸 모습이 흥미로웠다. 유독 검은 고양이 그림이 많은 것을 보면, 까만 얼굴 한가운데 장난스런 눈망울을 반짝반짝 빛내는 고양이는 작가의 분신 같기도 하다. 호리호리한 몸에 강인함을 숨긴 흑표범 여인, 또는 사람의 모습을 한 대장 고양이-조은정을 처음 만났을 때 받은 느낌이 그랬으니까.

고양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땐, 동그라미 두어 개로 머리와 몸통 위치를 표시할 뿐 밑그림 없이 즉흥적인 붓놀림으로 완성한다. 언뜻 보아 수묵화와 흡사한 느낌이 드는 것도 그래서다. 그러나 먹의 농담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한 붓에 그려내는 수묵화와 달리, 초벌구이를 한 기물은 습기를 잘 빨아들여 붓의 움직임이 뚝뚝 끊기기 일쑤다. 때문에 속도감 있게 그려내기도 어렵고, 채색에 쓰는 안료도 주성분이 돌가루인지라 일반 물감처럼 다루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여느 붓과는 달리, 그림을 그릴 때 단청 붓을 사용한다. 혹시 잘못 그렸을 때는 스크래퍼로 살살 긁어내면 된다.


한데 그가 처음부터 도예 공방을 연 것은 아니었다. 고양이를 좋아해서 고양이가 들어가는 물건에 관심이 많았고, 취미로 시작한 만들기가 어느새 직업이 된 것이다. 2000년경엔 고양이 쇼핑몰을 열고 쇼핑몰 창고 한쪽에 고양이 카페도 운영했지만, 당시만 해도 고양이 카페란 개념이 생소해 유지가 어려웠고, 쇼핑몰과 카페를 함께 닫아야 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도예 작업이었다.

“카페 손님 중에 혜화동에서 도예 작업실을 하는 분이 계셨어요. 저야 늘 이런저런 고양이 물건을 만들고 싶어 했으니까, 고양이 밥그릇을 만들고 싶어서 공방에 갔죠. 근데 흙으로 빚어 만드는 작업은 당일엔 안 된다고, 그림을 한번 그려보라는 거예요. 도자 안료가 참 재밌더라고요. 어린애들 쓰는 12색 크레파스로 정물화 그리는 기분이었어요.” 
 

생활자기 만드는 일에 재미를 붙인 그는 한동안 사용료를 내고 혜화동 작업실을 함께 쓰다가 2005년 독립해 공방 ‘고양이 요람’을 열었다. 몇 차례 작업실을 이전한 끝에, 최근 새로 옮긴 작업실에서는 그릇에 그림도 그리고, 고양이 그림이 담긴 가방 등 생활용품도 만든다. ‘야호메이’라는 브랜드 네임으로 꾸준히 고양이 아트상품을 만들 생각이다. 이 브랜드명은 그가 키웠던 고양이들의 이름을 딴 것이다. PC통신 시절부터 온라인상에서 써온 야호메이, 혹은 메이라는 닉네임이 이젠 본명보다 더 친숙하다.  
 
“제가 만드는 게 생활자기잖아요. 그러니 작품으로 인정을 못 받을 때가 많아요. 아무리 멋지게 만들어도 머그컵 하나에 3, 4만원 쓰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렇다고 가격을 비싸게 붙이지도 못하죠. 너무너무 갖고 싶은데 가질 수 없는 그 마음을 알거든요. 나부터 ‘됐어, 살 수 없으면 만들지 뭐’ 하는 마음으로 만들기 시작한 건데, 비싸게 받을 수 없더라고요.”

고양이와 관련된 작업이라면 뭐든 신나게 몰입하는 그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작업이 있다. 아는 사람에게서 고양이 유골함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다. 오래 전 고양이 모임에서 친해졌다가 한동안 연락이 끊긴 친구가 갑자기 연락해올 때면, 혹시나 싶어 가슴이 철렁하다. 고양이와 함께 살아온 것도 벌써 13년째니, 그 무렵 알게 된 친구들의 고양이가 노년기를 맞이하고 하나둘 세상을 뜨는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인지 모른다.


문득 듣는 ‘아는 고양이’의 부고는, 조은정의 1세대 고양이들 역시 점점 나이 먹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일이기도 하다. 친구의 고양이를 위한 유골함을 만들면서, 조은정도 언젠가 고양이들에게 찾아올 죽음을 수없이 그려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만성 신부전으로 앓아온 양양이 2009년 6월 세상을 떠났을 때도, 같은 해 12월 재구가 양양 곁으로 갔을 때도 그들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고로 고양이가 죽거나, 고양이를 잃어버려서 생이별한 친구도 있거든요. 그때 느낄 감정이 어떤 건지 아니까…. 차라리 나이 먹어서 노환으로 죽은 게 어쩌면 축복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슬픔 속에서도 기쁨이 있다면 그런 거겠죠. 그거라도 있어야지, 그것도 없으면 어떻게 버텨요.”

태어날 때 함께하진 못했더라도, 마지막 순간은 최선을 다해 함께했다는 확신이 있기에 견딜 수 있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삶의 방식만큼이나, 죽음을 애도하고 극복하는 방식도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사별은 누구에게나 깊은 슬픔을 남기지만, 함께 사는 고양이의 죽음이란 그에게 ‘상실’보다 ‘완성’에 가까운 의미가 아닐까 싶다. “잘 죽는 것은 잘 사는 삶의 정점”이라 했던 로버트 풀검의 말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말이다. 목사였던 로버트 풀검은 <내 인생의 여섯 가지 신조>라는 글에서 “슬픔의 유일한 치료제는 웃음이며, 사랑이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걸 나는 믿는다”고 썼다. 나 역시, 그의 말을 믿는다.

  1. BlogIcon 입질의추억
    2010.12.14 09:00

    그림체가 굉장히 스타일리쉬하고 개성이 있네요.
    제가 이런쪽도 정말 좋아하는데 일러스트하는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좋은 하루 되세요^^

  2. BlogIcon yuna
    2010.12.14 09:12

    이분이 그 유명한 야호메이님이시군요.
    그림은 처음 봤어요. 좋네요 :-)

    (얼마 전 '고양이, 만나러 갑니다'를 읽기 시작했어요.
    나오자마자 샀는데 이제야.
    표지만 보고 선뜻 손이 가지 않았거든요.
    근데 좋더라고요. 좀 행복해지고, 여행가고싶어졌어요.)

    • BlogIcon 야옹서가
      2010.12.14 23:02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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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지에 고양이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넣을 걸 그랬나 보네요^^
      저도 또 고양이 여행을 떠나고 싶어지네요. 다닐 때는 힘들지만 다녀오고 나면 또 가고 싶고...

  3. BlogIcon Cate
    2010.12.14 09:14

    메이님 인터뷰 글이네요. ^^ 평소 메이님 블로그에 자주 들르는데, 이 곳에서 메이님 관련 글을 볼 줄이야~ ^^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4. BlogIcon 언알파
    2010.12.14 09:30

    하나쯤 소장하고픈 도자기네요. 보면서 저도 모르게 미소가 ㅎㅎㅎ

  5. BlogIcon misszorro
    2010.12.14 10:22 신고

    정말 멋진 분 같아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기에...
    몇년 전 떠나보낸 울 강아지가 생각나네요^^;;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분들 모두 사랑합니다 헤헤

    • BlogIcon 야옹서가
      2010.12.14 23:0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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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반려견을 먼저 떠나보낸 경험이 있으셨군요. 저도 언젠가 스밀라와 작별할 걸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지곤 하지만, 함께 있는 시간만큼은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요.

  6. BlogIcon 달콤시민 리밍
    2010.12.14 10:57

    제 동생이 보면 당장 갖고 싶다고 난리칠 것 같아요 ㅎㅎ
    고양이를 엄청 좋아하거든요~
    그림체가 독특해서 더 좋은 것 같아요^^

  7. BlogIcon Shain
    2010.12.14 11:07

    작품이 멋진걸요.. 고양이 캐릭터가 도기에서 저렇게 살아 있기도 하네요
    생활도기라고 하셨지만 두고 보고 싶은 느낌...
    진짜 고양이같은 느낌이 드는 작품들이네요

    • BlogIcon 야옹서가
      2010.12.14 23:06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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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에 걸어놓고 감상하는 작품도 좋지만, 일상생활에서 즐겨 쓰이는 그릇 속에
      들어간 고양이도 나름대로 소중한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8. 2010.12.14 11:09

    비밀댓글입니다

  9. 고돌칠미키
    2010.12.14 11:17

    이분 블로그에서 많은 양이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고양이 사랑도 남다르고
    무엇보다 아픈 아이들과 함께 해서 그런지 냥이에 대한 것도 누구보다 많이 아시는 분이더군요.
    늘상 우당탕 거리는 메이네 냥이들은 무척 행복해 보였어요~~~

    • BlogIcon 야옹서가
      2010.12.14 23:1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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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고양이에 대한 경험이 많으셔서 그런지 고양이에 대한 추억도 참 많이 들려주셨는데
      지면 한계상 줄여서 올릴 수밖에 없는게 안타깝네요.

  10. 야옹이랑 초코랑~!!
    2010.12.14 12:41

    냥이네에서도 유명한 메이님이시네요...역시~멋진 분이세요..^^

    전 재구가 젤로 기억에 남아요...정말 당당한 모습으로 살다가 행복하게 별로 돌아간 아이......

  11. 소풍나온 냥
    2010.12.14 14:02

    음~ 메이님이 저렇게 생기셨군여~~ 미인이신데요^.^

    다 가졌으면 좋겠을 냥이 자기들이지만(특히 술병?과 물잔이...)
    재구 등잔? 촛대? 장식......이 젤로 이쁘고 정이 가네요~~

    • BlogIcon 야옹서가
      2010.12.14 23:11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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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에게도 스밀라를 닮은 고양이가 그려진 고양이 술잔이 한 쌍 있습니다.
      아 그리고 말씀하신 작품은 그냥 고양이 모양 오브제인데요, 매달아서 전시하는...재구 모습의 고양이입니다.

  12. 새벽이언니
    2010.12.14 16:46

    만든분의 애정이 똑똑 떨어지는 작품들이네요
    까만 고양이를 보고 있으니 새벽이가 생각나요

  13. 유리동물원
    2010.12.14 20:38

    정말 이쁘네요. ^^

  14. BlogIcon 미요♪
    2010.12.15 02:02 신고

    저도 몇 번 방문한 적 있는 블로거 메이님이시네요 ^-^
    고경원님, 메이님 같은 분이 계셔서 사람들이 조금 더 고양이를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머니야머니야님 2009년 2월 포스팅 '내가 길고양이 통신원 고경원 기자를 좋아하는 이유'에서 2005년에 쓰신 기사를 봤어요 :)
    길고양이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 BlogIcon 야옹서가
      2010.12.15 13:25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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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에 쓴 글까지 찾아 읽어주시고 고맙습니다. 처음 길고양이를 만나 느꼈던 그 마음을
      끝까지 갖고 가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렇게 기억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많은 힘이 됩니다.
      저도 미요 이야기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15. BlogIcon 권양
    2010.12.15 19:47

    냥이네에서 많이 뵈었던 분이시죠^^최근 옮기신 작업장이날로 번창하셨음 해요^^화이팅!

    • BlogIcon 야옹서가
      2010.12.16 10:4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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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시통신 시절부터 고양이 모임에서 활동하셨으니까 정말 오래 활동하셨죠.
      그만큼 메이님 손을 거쳐 간 길고양이들도 많고.. 생명을 건진 업둥이들도 많았을 거예요.

★ 길고양이를 향한 따뜻한 응원 감사드려요~ 문의사항은 catstory.kr@gmail.com로 메일 주시면 확인 후 회신해 드립니다.



‘고양이 삼촌’ 유재선의 작업실은 내가 꿈꾸던 이상향과 꼭 닮았다. 한적한 주택가라 소음에 시달릴 염려가 없고, 정오께 작업실로 출근해 셔터를 올리면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곤 밥을 졸라대는 길고양이까지 있으니, 고양이 작가의 작업실로는 더 바랄 게 없다. 여섯 살배기 고양이 제이와 단둘이 사는 작가는 고즈넉한 작업실 한켠에서 고양이 그림을 그리고, 고양이 쿠션도 만든다.
 

일러스트레이션을 생업으로 삼고 있지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은 그를 일러스트레이터로만 규정하기엔 좀 서운하다. 그는 유리창에 마커로 그림을 그리는 윈도우 페인팅 작가로도 유명하고, 빈티지 인형을 파는 인형가게 사장님이자, 그림동화책과 잡지를 수집하는 고서점 주인이기도 하다. 그간의 작품을 모은 포트폴리오 격인 《고양이 삼촌》(레프트로드)도 펴냈다. 하드보드 표지를 손으로 일일이 붙여 만든 수작업 소량생산 책이다. 그렇듯 다양한 작가의 관심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곳, 일과 재미가 하나로 된 공간이 바로 유재선의 작업실이다. 

유재선은 작업실을 반으로 나눠, 수집품 전시 공간 겸 작업 공간으로 활용한다. 통유리창 너머로 언뜻 보이는 방이 전시 공간 쪽이다. 손때 묻은 빈티지 인형, 장정이 예쁜 그림책, 오래된 영화 속에서 슬쩍 꺼내온 듯한 빈티지 소품들…. 그동안 정성껏 모아온 오래된 보물들이 가득하다. 처음 작업실을 열었을 때, 동네 사람들은 ‘웬 총각이 인형 가게를 차렸나’ 했단다. 심지어 골동품 가게인가 묻는 사람도 있었다.


남들 눈에는 유행 지난 구닥다리로 보이거나 특이한 물건으로 치부될지라도, 그에게 소중한 이유가 있다. 그가 만드는 작품에 영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작업하기 전에는 항상 모아뒀던 옛날 잡지를 펼쳐본다. 특히 《라이프》지에는 지금 시각으로 봐도 신선한 광고들이 많아서 좋아한다. 몇 십 년 전에 나온 그림책이랑 동화책도 자주 본다. 오래된 것에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발견해내는 것이다.


유재선이 좋아하는 고양이에 빈티지 인형의 요소가 결합되어 탄생한 것이 바로 고양이 쿠션이다. 고양이를 의인화한 복고풍 캐릭터를 그리고, 그들의 손에 빈티지 인형과 소품을 쥐어줬다. 오뚜기 인형을 안은 고양이 소녀, 복고풍 뿔테안경에 헐렁한 바지를 입은 1970년대 올드스쿨 스타일의 고양이 소년이 하나둘 만들어졌다.


고양이 쿠션은 연필로 밑그림을 그린 다음 스캔을 받아서 타블렛으로 작업하고, 필름을 떠서 실크스크린 판을 만든 다음 수작업으로 찍어낸다. 타블렛으로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뿐 아니라,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한 천을 재단한 다음 쿠션 솜을 채워 넣는 작업까지 이 방에서 모두 이뤄진다. 일손이 바쁠 때면, 가끔은 누나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고양이 쿠션은 1차 10종 세트로 완성됐다. 앞으로도 새로운 버전의 고양이 쿠션을 꾸준히 만들어갈 예정이다.


작업대 앞에 놓인 붓과 그림 도구들 사이로 함께 사는 고양이 제이의 그림이 보인다. 작가 이름인 ‘재선’에서 영문 맨 첫 글자인 J를 따서 지어준 이름이다. 대학교 4학년 졸업 시즌인 2003년, 수원에서 자취하면서 10평짜리 오피스텔에 살던 무렵 처음 제이를 데려왔다.

“제이가 처음 저에게 왔을 때는 3개월 된 아기 고양이였어요. 졸업 시즌에 맞춰서 서울로 오려고 방을 내놓았는데, 제가 없을 때 복덕방에서 사람들에게 집을 보여주려고 문을 열었다가 고양이를 보고 놀란 거죠. 고양이가 있어서 집이 싫다는 사람, 문 열어보고 무섭다며 바로 나간 사람도 있었대요. 복덕방에서 ‘고양이 때문에 집이 안 나가는데 어쩔 거냐’고 저희 집에 전화하는 바람에, 고양이 버리라고 난리가 났어요. 지금은 이사를 자주 안하니까 그럴 일은 없는데, 그때는 고양이를 키우는 것 때문에 집에서 반대가 컸죠. ”


한번 고양이를 좋아하게 되니, 유럽 여행을 가서도 다른 사람이 풍경 사진 찍을 때 그는 길고양이에게만 눈길이 갔다. 그래서 찍어온 사진들을 뒤져 보면 온통 고양이 사진뿐이다. 이른바 ‘유럽 고양이 여행’을 하고 온 셈이다. 어린 조카는 고양이를 유달리 좋아하는 삼촌에게 ‘고양이 삼촌’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제가 유전적으로 천식이 있는데, 그래도 견딜 만해요. 털만 날리지 않으면 좋겠지만… 제이는 친칠라 종이라 털 색깔이 참 예뻐요. 저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차갑고 까칠하게 대하는데, 친구들이 안아보고 싶어 해도 너무 낯을 가려서 안타깝죠. 하지만 저는 제이가 저만 알아봐주고 다정하게 대하는 게 오히려 매력으로 느껴져요.” 


작가만 유독 따르는 고양이라서, 2009년 5월경 이곳에 작업실을 얻고 나서 제일 신경이 쓰였던 것도 제이였다. 그전까지는 집에서 하루 종일 함께 있곤 했는데, 이젠 오전 11시~정오 사이에 집을 나와 자정께 들어가니 반나절을 혼자 있을 제이가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집도 일부러 작업실과 가까운 곳으로 구했다. 걸어서 10여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여서, 짬짬이 제이랑 놀아주고 다시 작업실로 돌아온다. 


고양이가 없는 동안의 아쉬움은 작업실 근처 길고양이가 채워준다. 작업실로 놀러오는 길고양이는 모두 3마리. 작년 겨울부터 하얀 고양이가 안 보이기 시작해 걱정이란다. 나머지 2마리 중에 1마리는 매일 출근도장을 찍다하다시피 한다. 그 고양이에겐 ‘나비’라는 이름도 지어줬다. 중성화 수술을 했다는 표시로 한쪽 귀가 살짝 커팅된 것을 보면, 누군가 근처에 돌보는 사람이 있는 길고양이인 모양이다.

누구나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고양이 문구를 구상 중인 유재선의 또 다른 꿈이 있다. 대중적인 디자인문구 작업과 더불어, 마음대로 그려나갈 수 있는 순수회화 작업을 병행하는 것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이루고 싶은 꿈이다.


“제가 그린 고양이 캐릭터도 지금처럼 선적인 요소만 있으면 그냥 일러스트지만, 이걸 회화적으로 풀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장난감 종류에 고양이 그림을 접목시킬 건데, 이를테면 오뚜기 인형과 고양이를 100호짜리 캔버스에 그리는 거죠. 그림에 들어가는 소품이나 패턴에 빈티지 요소를 접목시켜서 재미있는 회화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날, 유재선의 작업실에서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미키마우스처럼 귀가 둥그런 모자를 쓴 고양이 쿠션이다. 작가가 정성스레 포장해준 비닐을 벗기고, 쿠션을 품에 안아본다. 볕이 잘 드는 작업실 창가를 오래 지키느라 쌓인 먼지 냄새, 햇빛 냄새가 난다. 꼭 고양이 한 마리만큼의 따뜻함과 포근함이 느껴졌다. 신기하게도 진짜 고양이를 품에 안은 것 같았다. 그 쿠션이 현실의 고양이와 비슷한 부피를 지녔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속에는 한 남자가 고양이와 함께 해온 6년의 시간이 스며 있으니까. 나는 그 추억의 따스함을 포옹한 것이다.

* 작가 홈페이지(www.jaesun-shop.com)를 궁금해하는 분이 계서서 정보를 추가합니다.
  쿠션은 수작업으로 그때그때 만드는 거라,  주문하시고 며칠 뒤에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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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logIcon Shain
    2010.12.07 08:42 신고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건.. 행복할 거 같아요
    생각나는대로 만들고 표현할 수 있고...고양이도 함께 살 수 있군요..
    고양이 삼촌 보기 좋습니다 ^^

    • BlogIcon 야옹서가
      2010.12.07 14:54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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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이든 쿠션이든 뭔가 새로운 것을 창작할 수 있는 능력은 참 부럽지요.
      손에 잡히지 않는 글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니까요.
      쿠션은 특히 안을 수 있어 좋구요.

  3. BlogIcon 짱똘이찌니
    2010.12.07 08:52

    남자분이 굉장히 섬세한 분인가봐요.
    인상도 좋으시고~
    인형도 너무 귀엽네요.
    이런 쿠션이라면 역시나 지난번 처럼 앉지도 못하고
    장식용으로 보관만 해야겠어요.

  4. BlogIcon 온누리
    2010.12.07 08:56

    정말 갖가지 쿠션이 다 있네요
    남자분이 아런 것을 하시다니 놀랍습니다
    고양이를 무지 좋아하시는 분인듯 합니다

  5. BlogIcon 파란연필
    2010.12.07 09:03

    고양이를 참 사랑하시는 분 같네요.... ^^
    오늘도 따뜻한 하루 보내시길 바래요~

  6. BlogIcon 벨제뷰트
    2010.12.07 09:15 신고

    예쁜 쿠션이라 고양이가 행복하겠네요;
    전문적으로 만들어서 그 가치가 더합니다.

  7. 민트맘
    2010.12.07 09:27

    고양이를 사랑하는 분이라선지 인상도 좋으시고,,(ㅎㅎ)
    작업실 위치나 전화번호도 알수있으면 좋을것 같은데요~

  8. 유리동물원
    2010.12.07 10:07

    이쁜 쿠션들이 많네요. ㅎㅎㅎ

  9. BlogIcon 봄곰아
    2010.12.07 10:09 신고

    삼청동에서 고양이쿠션 일러스트를 본적이 있어요.. 이뻐서 살짝 담아왔었는데.. 고양이삼촌님이셨군요..
    따뜻한 마음이 인터뷰를 통해서 전해지는듯해요.
    쿠션과 함께 고양이삼촌 그림책을 구입하고 싶은데.. 구입할 방법 좀 알려주세요 ^^

    • BlogIcon 야옹서가
      2010.12.07 15: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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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삼청동에서 하는 전시를 보셨군요.. 홍대 앞에서 전시했다는 글은 봤는데 삼청동 전시는 몰랐네요.
      홈페이지 소개도 위에 함께 해 드렸습니다.

  10. BlogIcon 소박한 독서가
    2010.12.07 10:11

    굉장히 젊으신 분이네요.
    보기만 해도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11. 그린레이크
    2010.12.07 10:26

    발려동물을 사란하시는 분들은 맘이 참 따뜻하지요~
    너그러운 인상에 선한 미소가 아름다우신 분이셔요~~

  12. BlogIcon 언알파
    2010.12.07 10:31

    너무 귀엽네요!! 저도 고양이 쿠션 하나 마련하고 싶은데요?^^

  13. BlogIcon carol
    2010.12.07 10:56

    방이 귀여운 여자아이 방 같아요
    그곳에서 많은 영감을 얻으신다니...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사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 할까요?

    • BlogIcon 야옹서가
      2010.12.07 15:03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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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산다는 게 쉽지 않지만, 그래도 꿈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분이기에 저도 응원해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고양이니까요.

  14. BlogIcon misszorro
    2010.12.07 10:58 신고

    고양이를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이 전해집니다
    정말 부럽기도 하고 멋있기도 하고
    고양이와 함께라면 넘 행복하겠죠?^^

  15. 미첼
    2010.12.07 11:00

    오.. 이런 우연이.. 저희집 아이 이름도 제이거든요, 거기다 집사만 따르는 성향까지 비슷한게.. 제이란 이름을 가진 녀석들의 까탈스러움인가요ㅎㅎ
    예전 다른 기사에서도 이분을 뵌것같아요. 길냥이 돌보는것도 여전하시네요.
    지난번 스밀라 닮은 쿠션부터 오늘까지, 쿠션에 대한 욕심만 늘어갑니다ㅎㅎ

  16. BlogIcon meryamun
    2010.12.07 12:32

    독특한 모양의 쿠션이네요...
    보자기 쓴 고양이 넘 귀여워요~~~

  17. BlogIcon 옹달샘
    2010.12.07 13:05

    아..그 가게에 한번 들어가면 못 나올거 같아요...
    쿠션들,아니 고양이들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18. BlogIcon 소춘풍
    2010.12.07 14:00

    길 고양이의 이름은 언제나 나비~ 가 되는게 신기해요.
    왜 나비라고 불리게 된걸까요? 음음..a

  19. 새벽이언니
    2010.12.07 16:03

    으음.. 천식인데 친칠라면 좀 힘드시겠네요;;
    저희도 엄마가 좀 그러신데도 불구하고 새벽이놈을 많이 이뻐해주셔서 그저 감사하답니다 ^^

    • BlogIcon 야옹서가
      2010.12.07 21:5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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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어머니도 약간 알러지 반응이 있는데 스밀라를 덥석덥석 잘 안아주세요.
      스밀라를 많이 좋아해주셔서 저도 어머니께 감사한 마음이 드네요. 반대하는 부모님도 많은데...

  20. BlogIcon 권양
    2010.12.07 23:50

    멋진분 이시군요^^재능도 너무나 다재다능하신분~부럽습니다^^
    저도 예전엔 이러저러 여러 손으로 만드는 소품들을 만들었었는데..요즘은 도통 만들지를 못했네요 ㅜ,ㅜ
    링크따라 조용히~건너가보겠습니다^^/
    편한 밤 되셔요~

    • BlogIcon 야옹서가
      2010.12.08 13:27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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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 작가분들 인터뷰를 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만드는 일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되었어요.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다시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21. 비비안과함께
    2010.12.07 23:50

    링크해 놓으신 주소에 가서 두루두루 구경 잘하고 왔습니다^^작업실이 굉장히 따뜻한 느낌이라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기분좋게 해주는 곳이네요. 저도 조금씩 자금을 모아 한아름에 안을 수 있는 쿠션에 한번 도전해봐야겠습니다.소개해주신 작가분들의 작품을 보면 같은 고양이라는 종을 소재로 했는데도 제 각각 그 분위기나 느낌이 달라서 재미있습니다. 은근 작품 분위기에서 작가의 캐릭터도 상상하게 되고... 그나저나 고양이는 주인도 못알아보고 충성심도 없는 동물이라는 유언비어는 누가 퍼트렸을까요?고양이 삼촌댁 제이도 그렇고 제와 함께 있는 비비안도 그렇고 냥이들은 오히려 진돗개처럼 자기의 반려인만을 바라보는데 말입니다.음...충성심이라는 단어에는 좀 문제가 있긴하군요...쩝.

    • BlogIcon 야옹서가
      2010.12.08 13:28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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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는 함께 사는 사람을 알아보지만 주종관계로는 생각하지 않고
      친구나 동거인 정도로 생각한다고 하죠. 그래서 그런 말이 나온 것 같아요. 스밀라는 아침에 일어나면 거실에서 자고 있다가 저를 보고 뛰어온답니다. 꼬리털을 휘날리면서..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 길고양이를 향한 따뜻한 응원 감사드려요~ 문의사항은 catstory.kr@gmail.com로 메일 주시면 확인 후 회신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