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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고양이 여행] 한국

사라진 밀크티

by 야옹서가 2010. 1. 26.
폭설이 내렸던 연초, 먹을것을 챙겨들고 은신처를 찾았다. 이미 해가 져서 어둑한 시간, 은신처 옆 분식점 창 너머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 아래 고양이들이 하나둘 달려온다. 카오스냥, 회색 턱시도냥, 노랑둥이, 모두 큰 소리로 우엥 울며 달려오는데,

유독 밀크티만 보이지 않았다. 눈 때문에 먹이도 구하기 어려울 테고, 번갈아가며 밥 주던 아줌마 아저씨도 쌓인 눈에 발걸음이

뜸해졌는데 밀크티는 왜 나타나지 않을까. 어둠 속에 흐릿하게 보이는 소나무숲 그늘 어딘가에 밀크티가 쉬고 있겠지,

바람막이 천막 속으로 깊숙이 몸을 숨겨 추위를 피하느라 미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거겠지. 불길한 상상을 억누르며

애써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발목까지 쌓여 녹을 기미가 보이지 않던 눈도 며칠이 지나 다 녹았는데, 여전히 밀크티는 없다. 잠시 눈앞에서 사라진 거라

믿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다. 화단 어딘가에, 싸늘하게 식은 밀크티가 누워있는 모습을 보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밀크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눈과 함께 녹아 없어져버린 것처럼.  



밀레니엄 고양이들 중에 밀크티를 가장 좋아했고 2007년부터 서로 얼굴을 익혔어도, 밀크티를 쓰다듬으려 시도하거나 

집고양이에게 하듯 장난감으로 놀아주거나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처음 길고양이를 따라다니기 시작할 때는

좋아하는 길고양이가 나를 모른 척하면 서운하고, 친숙한 태도를 보여주면 사랑스러운 마음에 더욱 정이 갔지만,

길고양이가 인간과 친숙해지면서 겪게 되는 고난을 전해듣고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다. 인간과 적당한 거리를 둘 때

안전하게 남은 여생을 살 수 있는 확률도 높아질 테니까. 그들의 삶을 기록하고 기억하되, 관찰자의 시점을 유지하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같았다. 



은신처를 찾아간 날이면 내 카메라는 대개 밀크티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의 뒷모습을 살그머니 찍고,

그 뒤통수에서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감정의 흔들림을 발견하려 애쓰는 사람처럼 지켜보기만 했다. 밀크티가 주변의 나무들처럼

나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까지. 내가 나무가 되었을 때, 밀크티는 내 앞에서 얼쩡거리며 무심코 하품을 하거나,

무방비 자세로 식빵을 굽거나, 친구들과 해맑게 놀곤 했다. 하지만 이제 내가 나무가 되어도 등걸에 발톱을 갈거나 등을 부빌

밀크티가 없다. 나의 망상을 비웃듯 밀크티가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준다면 좋겠지만, 다음에 찾아갔을 때도 만나지 못한다면

불안한 예감이 확신으로 바뀔 것만 같아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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