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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제품 | 전시 | 공연

사랑에 배신당한 베트남 여인의 수난, 미스 사이공

by 야옹서가 2010. 3. 23.

세계 4대 뮤지컬 중 하나로 손꼽힌다는 '미스 사이공'을 보고 왔습니다. 3D 입체영상과 음향으로 실감나게 재현된 헬기,

극의 실질적 중심인 베트남 포주 엔지니어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장면에서 무대에 등장하는 고급 캐딜락, 

호치민 치하의 살벌한 베트남을 힘있는 군무로 표현한 장면과 방콕의 화려한 홍등가 모습 등

대작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무대가 인상 깊었습니다. 사진과 함께 애절했던 공연의 기억을 되새겨봅니다.

3월 19일 공연 캐스팅입니다.


(이 글에는 줄거리가 구체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미리 알려드립니다.

참고로 공연 촬영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아래 사진들은 주최측의 자료 사진을 리뷰용으로 사용 허가받은 것입니다.)



1975년 베트남, 어두운 무대 한가운데, 가족을 잃은 베트남 여인 킴이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서 있습니다.


평화롭던 거리는 공습과 함께 아수라장이 되고, 킴은 낯선 남자(엔지니어)의 손에 이끌려 클럽 '드림랜드'로 향합니다.  

클럽의 퇴폐적인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앙상블 배우들이 노출 심한 복장으로 등장해 미군과 함께 뒤엉킵니다. 

이번 공연이 '8세 이상 입장가'라고 되어 있는데 어린 아이들이 보기에는 적합치 않은 노출 수위입니다.    


드림랜드에서는 미군에게 몸을 파는 베트남 여인들을 세워놓고 흥을 돋구기 위해 '미스 사이공'을 뽑습니다.
 
가장 섹시한 여자인 지지가 미스 사이공의 왕관을 쓰지요. 지지의 꿈 역시 미국 비자를 받고 베트남을 탈출하는 

것이지만, 순간의 쾌락만 생각한 미군 존은 그녀의 애타는 소원을 들어줄 리 없습니다. 
 
화가 난 클럽의 여인들은 미군을 비난하며 다함께 THE MOVIE IN MY MIND를 부릅니다.


킴은 몸도 팔고 웃음도 팔 거라고 다짐하지만,  닳고 닳은 다른 아가씨에 비하면 쑥맥인지라 곤란함을 겪습니다.

포주 엔지니어는 그런 킴의 '상품가치'를 재빨리 파악하고, 그녀와의 하룻밤을 비싸게 흥정합니다.

미군 존은 함께 클럽에 온 우울한 친구 크리스를 위해 킴과 동침하라고 부추깁니다.  
 

처음 본 미군과 갑자기 사랑이 싹틀 만한 일도 없건만, 킴은 "좋아해요, 크리스" 한 마디 던지고 잠자리로 데려갑니다.

동침한 다음날 아침 'WHY GOD WHY'를 노래하는 크리스의 목소리
는 애절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사랑의 감정을

갖기까지 두 사람의 감정이 발전되는 과정이 너무나 단편적이어서 보는 이에겐 큰 설득력이 없다고 할까요?

킴이 대단히 보수적인 여자여서, 하룻밤 동침한 남자는 남편으로 맞이해야 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모르겠는데, 아무리 그랬다 하더라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에 이들의 관계는 탄탄해보이지 않습니다. 

킴이 크리스에게 가족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아야만 했던 과거를 절규하듯 부르짖긴 하지만,

겨우 그것만으로 불 같은 사랑이 싹틀까 싶습니다. 그래서 둘의 사랑에 그다지 개연성이 없다고 느껴지는데
 
크리스 역시 여느 미군들처럼, 베트남 전쟁에서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공포를 잊기 위해 여자의 몸을 탐했고,

킴 역시 베트남을 탈출해 미국으로 가는 꿈을 실현시켜줄 보험 같은 존재로 크리스를 붙잡으려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을 떠나,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의 이중창 'SUN AND MOON'은 애절하고 아름답습니다. 

킴은 언제 베트남을 떠날 지 모르는 크리스와 베트남식 결혼을 하기로 합니다. 결혼예복을 입고,

전쟁통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영전을 향해 절을 올리는 킴의 모습입니다.

퇴폐적인 분위기로 넘실거리던 클럽은 결혼식을 준비하는 킴의 동료들에 둘러싸여 따뜻한 분위기로 변합니다.

이들이 뒤에서 불러주는 결혼 축하곡은  이국적이면서도 달콤한 분위기로 가득차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호들갑스러운 클럽 언니들의 반응이 재밌습니다. 미군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꿈의 '미국 비자'를 받을 수 없기에,

언니들은 더욱 부러운 마음으로 이들의 결혼을 지켜보았는지도 모릅니다. 한데 결혼식의 달콤함이 사라지기도 전,

킴의 정혼자인 사촌 투이가 권총을 들고 들이닥칩니다. 킴은 부모님이 어린 시절 정해주신 배필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투이를 거부합니다. (이 아가씨, 보수적인 것 같으면서도 이런 면을 보면 또 보수적인 것 같지 않고;;) 

엉망이 된 결혼식장은 둘의 불안한 미래를 상징합니다.

3년 뒤 호치민 치하에 들게 된 베트남은 갈수록 분위기가 흉흉해지고, 미군도 서둘러 베트남 철수를 준비하게 됩니다. 

호치민의 유령 같은 얼굴이 둥실 떠오른 아래, 긴박감 넘치는 군무와 함께 펼쳐진 THE MORNING OF THE DRAGON

장엄한 노래와 안무의 무대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군무가 끝나면 삭발을 당한 초라한 남자가 등장하는데, 엔지니어입니다. 잘 나가던 드림랜드 클럽의 포주였던 그는

이제 가난뱅이 신세로 군부의 눈치를 보며 굽신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를 불러다가 새로운 임무를 맡기는 '위원장'은

바로 킴의 정혼자였던 투이입니다. 투이는 엔지니어에게, 종적을 감춘 킴을 이틀 내로 찾아오라는 명을 내립니다.


빈민촌에서 힘겨운 생활을 보내던 킴은 크리스를 그리며 노래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크리스는 이미 1년 전

엘렌과 결혼을 한 상태입니다. 안락한 침실에서 부인 곁에 잠들었지만 여전히 베트남의 악몽을 꾸는 남편을 위해

엘렌이 부르는 노래와, 킴이 크리스를 그리는 모습이 이중창 'I STILL BELEVE'를 통해 절묘하게 겹쳐집니다.


한편 투이는 엔지니어의 도움으로 킴을 찾아내지만, 킴은 투이를 거부합니다.  그런 킴을 협박하기 위해 투이는

"미군의 창녀였던 저 여자를 처단하라"고 부하들에게 명을 내립니다.그러나 킴은 손톱이 뽑히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따르지 않습니다. 군인들의 총구가 킴의 머리를 향하는 찰나 투이는 부하들을 내보내고 다시  
킴을 회유하지만,

킴은 투이를 따라갈 수 없는 또 다른 결정적인 이유로 크리스의 아들 '탬'을 보여줍니다.


투이가 탬을 죽이려 하자, 킴은 크리스가 남겨주고 간 총으로 투이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게 되고, 결국 도움받을 곳을 찾아

포주였던 엔지니어를 다시 찾아갑니다.


미국 비자를 받을 길을 찾아 헤매던 엔지니어에게, 미군의 자식인 탬은 베트남을 뜰 수 있는 확실한 보증수표이지요.

엔지니어는 킴의 오빠 행세를 하며 이들을 보호해주기로 약속하고, 세 명이 함께 방콕으로 탈출하며 1막이 끝납니다.




20분의 막간 휴식 후 이어진 2막은
미군베트남 여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 '아메라시안' 아이들을 구제하고자 조직된

부이 도이 재단의 앙상블로 시작됩니다. 부이 도이란 '삶의 먼지' 같은 존재를 뜻한다고 합니다.

한때 베트남의 매춘클럽 드림랜드에서 방탕한 생활을 했던 존(크리스의 미군 동료)은 개과천선하여,  

베트남 혼혈 아이들의 미군 아버지를 찾아주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크리스의 여인이었던 킴이 아들과 함께 방콕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지만, 크리스는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기보다 난색을 표합니다. 베트남에서 만난 킴은 어두운 과거의 한자락일 뿐, 그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크리스는 용기를 내어 아내 엘렌과 함께 방콕으로 킴과 아들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합니다.

이제 크리스가 킴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닌 죄책감인 듯합니다.


그럼 크리스는 왜 킴과 헤어지게 된 것일까. 베트남 철수 당시의 상황이 플래시백처럼 재연되어 무대에 보여집니다.

미스 사이공의 백미라 할 수 있는 헬기 탈출 장면도 2막에 등장합니다. 실제 헬기가 아닌 3D 입체영상이지만 머리 위를

가로질러  멀어지는 헬리콥터 소리와 함께 보니 꽤 실감납니다. 이 장면에서 무대는 미군들이 보호되고 있는 창살 안과,

미군을 따라 탈출하려는 베트남인들이 절규하는 창살 밖을 교차해서 보여주는데, 당시의 아비규환이 생생나게 

느껴질 만큼 안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날 적어도 크리스는 킴을 버리고 갈 생각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민서류와 돈, 권총까지 있었지만

급박한 철수 상황에서 모든 서류를 갖추었어도, 킴은 굳게 닫힌 철조망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미군을 따라가려는 베트남 국민을 다 태울 수 없고, 여차하면 폭도로  바뀔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킴은
비명을 지르고, 달러 뭉치를 내밀고, 크리스가 준 권총을 높이 쳐들어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3년 뒤로 시간을 돌려 킴이 있는 방콕을 찾아가 봅니다.

베트남에서 포주 생활을 하던 엔지니어는, 방콕의 사창가 클럽 물랭루즈에서도 여전히 호객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또 다시 창녀로 나선 킴을 윽박지르며, 한편으론 일을 못한다고 고용주로부터 면박을 당하기도 하면서...
 

크리스가 방콕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엔지니어는 킴에게 호텔방 번호를 알려주며 확실히 꼬셔오라고 다그칩니다.

킴은 3년 전의 결혼예복을 입고 크리스가 묵은 호텔로 찾아가지만, 킴이 일하는 사창가로 찾아간 크리스와 엇갈립니다.

호텔방에는 크리스의 아내 엘렌만 있었고, 두 사람은 서로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괴로워합니다. 급기야

크리스가 꼭 탬을 데려가야 한다며 방을 뛰쳐나가는 킴, 그런 킴을 보며 무거운 마음이 된 엘렌...침묵이 감돕니다.


킴을 만나러 갔다가 허탕 치고 존과 함께 돌아온 크리스는, 지금 가장 소중한 건 바로 당신이라며 엘렌을 달랩니다.

킴에게는 생활비를 보내고 탬은 미국학교를 보내주면 괜찮을 거라고, 킴도 다 이해할 거라고 스스로 위안해 봅니다. 

뭐 이 정도면 사랑이고 뭐고 남아있는 게 없고, 죽을 고생을 하며 방콕까지 온 킴만 비참해졌네요.


한편 킴을 크리스가 있는 호텔방으로 보낸 엔지니어는 곧 미국인이 될 단꿈에 젖어 있습니다. 

돈만 알고 냉혹한 인물로 보였던 엔지니어 역시 프랑스인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몸을 파는 엄마를 위해 호객행위를 하면서
 "우리 엄마 끝내줘요" 하고 외치고 다녀야 했습니다. 

괴로운 기억만 가득한 베트남을 떠나 미국인이 되면, 부와 행복을
동시에 얻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어떨까요.

미국 이민에 성공한다 해도 그 역시 하류인생을 살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미국인을 발판 삼아 베트남을 탈출하려 했던 민초들을 상징하는 
엔지니어는 실질적인 이 뮤지컬의 주인공입니다. 

19일 엔지니어 역으로 분했던 이정열 씨는 능글능글한 역할을 잘 표현해주었는데요. 

 
머리가 어쩐지 어색하다 했는데, 가발이었습니다. 중반의 죄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삭발까지...

온몸에서 느끼함이 넘쳐 흐릅니다. 그는 미국 국민이 될 날을 꿈꾸며 'THE AMERICAN DREAM'을 부릅니다.

당시 운행했던 캐딜락의 모습을 본따 만든 자동차가 무대 한가운데로 슬금슬금 굴러들어옵니다.


엔지니어가 베트남에서 운영했던 클럽 이름이 '드림랜드'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한데, 미국이 그에게는 말 그대로 

드림랜드, 꿈의 나라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 꿈을 깨고 나면 깨닫게 될 현실은 여전히 냉혹할 것입니다. 




모든 상황을 파악한 킴은 절망 속에서 탬의 미래를 위해 마지막 선택을 합니다. 자신은 크리스에게 짐이 되는

존재일 뿐, 크리스를 따라갈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킴은 아들에게만이라도 새로운 삶을 주고 싶어 합니다.

탬이 지금껏 입던 베트남식 옷 대신 미국식 옷으로 갈아입힌 킴은, 엄마 얼굴을 잊지 말라는 작별 인사를 남긴 채

크리스가 준 마지막 선물인 권총으로 자살을 하고 맙니다. 뒤늦게 그녀를 찾아온 크리스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한번만 안아달라는 소원을 남긴 채... 

  
공연을 보기 전에는 '전쟁 속에 피어난 애절한 사랑과 모성애'가  이 뮤지컬의 핵심 주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공연을 보고 난 뒤에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한 아련함보다, 전쟁이란 극한 상황을 겪으면서 

베트남을 탈출해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사람들의 처절한 수난사에 초점을 맞추어보게 됩니다. 
 
 베트남 파병 당시 현지 여성들과 관계를 맺어 이른바 '라이따이한'을 태어나게 한 한국군도 있었던 만큼

한국인에게 있어 '미스 사이공'의 비극은 단순히 미국인의 어두운 과거로만 남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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