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출봉으로 향하는 어머니를 찍어드리느라 부지런히 계단을 뒤따르는데, 불쑥 나타난 노랑얼룩이. 어머니의 추억앨범을 만들어드리는 게 이번 여행의 목적 중 하나이지만, 여행 중에 만나는 길고양이를 찍는 일도 포기할 수는 없다. 고양이도 산 위쪽으로 도망가는 것은 힘든지, 계단을 거쳐 아래로 내려가면서 달아난다.
사람들이 우측통행을 하는 동안, 고양이는 사람이 뜸한 왼쪽 길로 내려간다. 도망가는 와중에도 잠시 꼬리를 치켜들고 치익 오줌을 내뿜어 영역표시를 하는 여유를 보여준다. 어머니는 산으로 계속 올라가시고, 나는 반대쪽으로 내려가는 상황이 되고 말았지만 일단 낯선 여행지에서 길고양이를 만난 반가움에 고양이 쪽을 따라가기로 했다.
일출봉을 등지고 수풀 속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람 왕래가 많은 계단에서는 낯가림을 하는 눈치더니, 자기만의 안식처에 머물 때는 나를 신경쓰지 않는 눈치다. 내가 제법 가까이 다가갔는데도 달아날 기색이 없다. 이럴 때는 나도 모른 척 슬금슬금 거리를 좁혀나간다.
녀석이 앉은 자리를 보니 그곳을 편안해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알고보니 다른 쪽은 푸른 풀이 뻣뻣하게 자라 깔고앉으면 뱃가죽이 따갑지만, 마른풀이 깔린 이 자리는 이미 몇 번 깔고 앉은 자리여서 편안했던 게다. 새들이 마른잎을 물고 와서 둥지를 만들듯이, 고양이도 자기만의 깔개를 애용하고 지켜낸다. 수북한 마른풀을 고양이가 하나하나 물어온 건 아닐 테고, 아마 일출봉 곳곳을 누비고 다니다가 마침 마른풀이 쌓여 있는 명당자리를 발견하고 제 것으로 삼은 모양. 내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으니 볼 일 없으면 그만 가라며 멀뚱멀뚱 쳐다보기까지 한다.
"아니 왜 안 올라오는데?" 하며 어머니가 기다리다 못해 나를 찾아나설 때까지도 고양이는 꿈쩍하지 않았다. 덕분에 고양이를 좋아하시는 어머니께도 노랑이를 보여드릴 수 있었고.
길고양이는 급기야 단잠에 빠진다. 사람이 둘이나 눈앞에서 어른거리는데도... 그만큼 넉살 좋은 녀석이거나, 우리가 별 위협이 안되는 사람들이라는 걸 눈치로 알았거나 했을 것이다. 급히 고양이를 뒤쫓느라 미처 꺼내지 못한 사료봉지를 주섬주섬 꺼내어 고양이 곁에 풀어놓는다. 잠에서 깨어나면 녀석 곁에는 먹음직한 한 끼 식사가 놓여있을 것이다. 눈 떠 보고 발견한 느닷없는 횡재에 길고양이는 '아직도 꿈에서 깨지 않았나' 하고 의아해할까.
6/26(수) 오후 7시, 홍대 살롱드팩토리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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