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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제품 | 전시 | 공연

아무 것도 못 버리는 사람

by 야옹서가 2005. 1. 24.

헌책방 다니기를 소일거리 삼아 하다보니 책이 점점 늘어 감당하기 힘든 지경이 돼 간다.
장서가 몇 만 권에 달하는 애서가들과는 비교도 안 되겠지만, 일단 기본적인 개인 공간이
그리 넓지 않고 거기서 책에 할애할 공간은 한정되어 있으니, 들어갈 구석을 찾지 못한 책들이
방 이곳저곳에 쌓이고, 거기에 온갖 잡동사니들이 끼어들면서 거의 디씨폐인 갤러리에 올리면
딱 좋을 상황이 되어 가고 있다. (차마 사진은 못 올리겠다-_-)

언젠가 TV드라마에서 주인공 여자의 어머니가 무슨 방이 이렇게 어수선하냐고 꾸짖는 장면이
나왔었다. 그 장면을 본 동생과 나는 서로 쳐다보며 "훗훗" 하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나눴다.
우리는 진정 어질러진 방이 어떤 상태인지 알기 때문이다. 아마 염화시중의 미소가 이런 것이리.
부연하자면, 그 여자의 방은 매우 깨끗한 방을 일부러 어질러놓은 듯한 분위기의
'작위적인 어수선함'이었다. 이를테면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방의 바닥에 수건 하나 던져놓고,
잡동사니 하나 없는 책상 위에 책 서너 권을 흩어놓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아마 그 드라마 속 어머니가 내 방을 본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질 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이 정도는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악당인 사람 없고, 어렸을 때 천재 아닌 사람 있느냔
말도 있지만. 하여간 책을 분야별로 정리해 두고 꽂아둔 책 위로 뭔가를 올려두면 질색을 했는데,
언제부턴가 책을 꽂아둔 윗부분의 비는 공간에 하나둘 책이 끼어들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책꽂이 앞에 책이 하나둘 쌓이다가, 그 책더미 위에 또 책이 쌓이면서 책꽂이를 따라
조그만 담(-_-);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그 담이 점점 성곽에 가까운 모양으로
두터워지고, 나중에는 반대편 벽에도 담이 쌓이기 시작해 지금은 딱 누울 공간 정도만 남겨져 있다.
베란다 쪽은 더 가관이어서 그동안 모은 잡동사니와 인형 재료들이 역시 책과 함께 쌓여 있다.

더러는 내다 팔고, 더러는 아름다운가게에 보내고, 잡지나 도록처럼 시의성을 띤 책이라던가
다른 사람에게 주기 뭣한 책은 분리수거일에 내다 버리기도 했지만 여전히 헌책방에서 사오고,
인터넷서점에서 사들이고, 분리수거일에 주워오는(-_-) 등의 다양한 경로로 새로운 책이
자꾸 들어오니 결국 제로섬 게임이 된다. 최근에는 마루와 현관 쪽으로까지 책들이 진출했다.

좀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무 것도 못 버리는 사람>이란 책까지 샀건만.
책마다 얽힌 사연이 있고, 또 버리고 나면 나중에 필요하게 될 것 같아서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올 연휴 때는 한 이틀 날 잡아서 책꽂이 앞의 담벼락만이라도 걷어내야겠다.

참고로 <아무 것도 못 버리는 사람>은 잡동사니 인생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에게 아주 유용한 책이다.
자화자찬 식의 말투가 거슬리기는 하지만.("이럴수가! 선생님 덕분에 제 인생이 달라졌어요!" 식의
쇼핑 호스트 대본 같은 독자 편지가 너무나 자주 인용된다) 뭐 그의 조언을 따라 한 독자들이
그렇게 긍정적으로 인생을 바꾸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 저자의 말 중에서 기억나는 것 두 가지.(똑같은 내용은 아니나 글의 어조는 이렇다)
1년 동안 쓰지 않은 물건들은 앞으로도 결코 쓰지 않을 물건들이다.

쓰지 않는 물건은 정체된 에너지를 의미한다. 이것을 버려야 에너지의 순환이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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