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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제품 | 전시 | 공연

그림으로 마음 치료했던 대문호 헤세

by 야옹서가 2005. 1. 26.
[미디어다음/2005. 1. 26]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1월 30일까지 ‘헤르만 헤세-화가의 눈을 가진 시인’전이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는 헤세의 수채화 소품 50여 점과 판화, 친필 사인본, 안경과 타이프라이터 등의 유품을 포함한 총 150점의 소장품을 감상할 수 있다.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1962)는 시인이자 소설가로 유명하지만, 화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단지 만년의 취미생활로 수채화를 그렸다는 정도만 알려졌을 뿐이다. 그러나 헤세에게 그림이란, 혼탁한 세상에서 상처 입은 마음과 정신을 다독이는 과묵한 친구와도 같았다. 40세 무렵부터 아마추어 화가로 활동을 시작해 약 3천여 점의 미술작품을 남겼지만, 현재 헤세의 작품은 1천여 점 정도만 남아 있다고 한다.

헤세는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겪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4세에 신학교에서 쫓겨나고 15세에는 자살을 기도했던 시인 지망생 헤세는, 시계공장 견습공과 서점 점원을 거쳐 21세에 첫 시집 <낭만의 노래>(1898)를 펴냈다. 이후 소설 <페터 카멘친트>(1904)로 일약 유명작가가 됐지만 헤세의 시련은 끊이지 않았다. 1916년 아버지의 죽음과 첫 부인의 정신분열증으로 충격을 받은 헤세는 융 학파의 일원인 J. B. 랑 박사에게 심리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헤세의 화가로서의 이력이 이 무렵 시작됐다는 점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그가 내면 치유의 수단으로 그림을 그렸음을 간접적으로 입증해 주기 때문이다.

헤세가 주로 그린 것은 나치의 탄압을 피해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하고 은거했던 곳, 즉 루가노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평온한 시골 풍경과 몬테뇰라 근교의 자연이었다. 이 시절 헤세의 그림에는 사람들이 일순간 증발한 듯 인기척이라곤 없다. 나치의 탄압 때문에 조국을 떠나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해야 했고, 두 번의 이혼이란 개인적 시련까지 겪으며 인간 세계에 환멸을 느낀 헤세가 그림 속에서 모든 인간의 존재를 지워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 마냥 어둡지는 않다. 맑은 수채화로 그려낸 스위스의 자연 풍경은 그에게 진정한 평안을 주었다. 불혹의 나이에 그림 속에서 ‘마음의 평안’이라는 보물을 발견한 헤세의 경이로움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 즉 그림을 그리는 가운데 종종 견디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는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를 발견했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는 중요치 않다. 내게 있어 그것은 문학이 내게 주지 못했던 예술의 위안 속에 새롭게 침잠하는 것이다.”
-펠릭스 브라운(Felix Braun)에게 보내는 편지(1917) 중에서(출처 www.hermann-hesse.de/kr)

"펜과 붓으로 작품을 창조해내는 것은 내게 포도주와도 같아서, 그것에 취한 상태가 삶을 그래도 견뎌낼 수 있을 정도로 따스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프란츠 칼 긴츠카이(Franz Karl Ginzkey)에게 보내는 편지(1920) 중에서

스케치용 간이 의자를 ‘파우스트의 외투’로 부를 만큼 그림의 마술적 힘을 믿었던 헤세. 그림을 향한, 이처럼 진솔한 애정 고백도 드물지 않을까. 전시문의 031-481-3827.


헤세는 주위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할 때 직접 만든 그림엽서를 즐겨 사용했다.


‘사각 기둥이 보이는 마을’(연도 미상). 인적 없는 황량한 거리가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


‘테신의 풍경’(1936). 동판으로 찍고 수채화로 채색해 정돈된 느낌이다.


<여섯 편의 시>에 그림을 곁들였다.왼쪽부터 ‘3월’, ‘이별’, ‘사랑의 노래’ (1927)

‘정원사 헤세’(1932). 평생 정원 가꾸기를 즐겼던 자신을 그린, 보기 드문 헤세의 인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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