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일/ 2006. 3. 6] 뛰어난 성악가이자 음악교사였던 P선생. 사고력도 시력도 멀쩡하지만, 언제부턴가 그의 눈에 모든 사물이 원래 모습과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해 머리에 뒤집어쓰려 낑낑대고, 벽에 걸린 추시계를 사람으로 오인해 악수를 건네는 일마저 생겼으니 어쩌면 좋을까? 괴짜 같은 유머감각의 소유자로만 보였던 P선생은, 사실 뇌종양 후유증 때문에 형태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된 ‘시각인식 불능증’ 환자였다.
뉴욕대 의대 신경학과 부교수인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이마고 펴냄)는, P선생을 비롯해 독특한 유형의 신경장애 환자 24명을 소개한 임상사례집이다. 그러나 의사가 썼다 해서 딱딱한 논문 같은 글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경쾌하고 자유분방한 표지 그림과 삽화는, 의학전문서 아닌 ‘인간미 넘치는 임상체험 에세이’를 지향하는 이 책의 의도를 슬며시 보여준다.
엽편소설 같은 의학 에세이
책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는 엽편소설을 방불케 할 만큼 짧다. 하지만 신경전문의이자 극작가인 색스는 소설가 뺨치는 글 솜씨로 역행성 기억상실증, 시각인식 불능증, 무정위운동증, 코르사코프 증후군, 투렛증후군 등 이름도 생소한 질병과 맞닥뜨린 환자들의 모습을 실감나게 재현해냈다.
활동적인 컴퓨터 프로그래머였으나 어느 날 위치감각을 잃어버리면서 온몸이 사라진 것처럼 느끼는 20대 여성 크리스티너, 지능은 낮지만 한번 본 형상은 원본보다 생동감 있게 그려내는 자폐증 예술가 호세, 피사의 사탑처럼 몸을 기울인 채 걷지만 스스로 똑바른 자세라고 느끼는 맥그레거 할아버지, 스무 살 이전의 과거는 기억하지만 현재는 단 1분간만 기억할 수 있는 퇴역 군인 지미, 왼쪽에 대한 방향감각을 상실해 립스틱을 오른쪽만 칠하고, 음식도 식판 오른쪽에 담긴 것만 먹는 노부인…. 소설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이야기이지만 모두 실존했던 환자들의 임상 사례다.
고통 속에 빛나는 극복 의지
개별 임상사례가 독특하다보니 자칫하면 선정적인 소재주의적 접근에 그칠 수도 있지만, 이 책은 흥미와 의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기실 색스가 이 책에서 들려주고자 한 것은, 신경장애를 극복하고자 발버둥치는 환자들의 내밀한 투쟁 과정이다.
색스를 찾아온 환자들의 신경장애는 원상복구가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환자들은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고 어떤 식으로든 극복하려 애쓴다. 예컨대 ‘걸어 다니는 피사의 사탑’ 멕그레거 노인은 안경에 조그만 수평계를 달아 수평 감각을 회복하고, 신경매독에 걸린 노파는 후유증으로 인한 과다한 활력을 억제하는 대신,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즐긴다.
자신의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신경장애를 극복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반대편에, 장애를 삶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또 다른 선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공존하기에 이 책은 한층 인상적이다. 서두에 인용된 아이비 맥킨지의 글은 이 책의 주제를 압축해 보여준다.
“의사는 자연학자와 달리…단 하나의 생명체, 역경 속에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키려고 애쓰는 하나의 개체, 즉 주체성을 지닌 한 인간에 마음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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