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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제품 | 전시 | 공연

상처와 봉합…치유를 꿈꾸는 노작가의 여정 ‘루이즈 부르주아’전

by 야옹서가 2005. 4. 23.
[미디어다음/ 2005. 4. 23] 알코올중독자 아버지의 상습적인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해 우발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한 어느 여중생의 사연이 최근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가장 소중한 안식처여야 할 가정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가족 구성원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린다. 특히 불안과 두려움이 일상화된 생활 속에서 증오와 죄책감의 양가감정을 겪으며 자란 자녀들은 성인이 된 뒤에도 그 후유증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하지만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예술로 치유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실제로 예술치료는 심리치료의 한 분야로 각광받고 있으며, 임상적 접근이 아닌 순수예술 측면에서도 이와 같은 주제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 특히 이달 12일부터 다음 달 13일까지 서울 사간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루이즈 부르주아’전은 눈여겨볼 만하다.

프랑스 태생의 미국 조각가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1911~)는 자신을 가르치던 영어선생과 아버지의 불륜 때문에 심각한 정신적 혼란에 시달리며 성장했다. 하지만 그는 조각을 공부하면서 잠재된 고통스런 기억을 끄집어내 형상화함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얻고 삶의 통제력도 되찾을 수 있었다.

아픈 기억을 창작의 원천으로 삼아 예술로 승화시킨 그의 작품은 개인사적 서술에 머물지 않고 페미니즘 미술과 연계되면서 더욱 큰 힘을 얻었다. 1982년 뉴욕 MoMA에서의 회고전을 계기로 그 위상을 드높인 부르주아는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는 등 노년에 이르러 더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최근 루이즈 부르주아가 2년 간 제작한 드로잉 100여 점과 더불어 손바느질로 만든 36장짜리 헝겊 퀼트 책과 석판화, 조각 2점 등이 함께 전시된다. 94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창작활동을 지속하며 화해와 치유의 메시지를 전하는 작가의 근작들을 만나본다. 문의: 02-735-8449.


‘The Couple’(2002)에서 밀실은 촘촘히 꽂힌 철사와 유리구슬로 만든 감옥으로 변주된다. 철사와 구슬로 만든 울타리 한 가운데 부르주아의 후기 작품에 빈번히 등장하는 헝겊 인형 한 쌍이 보인다.


깊이 포옹한 두 인형은 고통스런 기억과의 화해를 꿈꾸는 작가의 소망을 드러낸다. 손바느질로 꿰맨 인형의 피부에는 바느질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바늘은 날카롭기에 상처를 입힐 수도 있지만 이처럼 상처를 아물게 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기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가가 1912~1917년까지 살았던 파리 시 외곽에 위치한 슈아지 르 루아의 집을 모티브로 삼은 작품이다. 흔히 집은 지친 몸을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상징되지만 아버지로 인해 상처받은 작가에게는 감옥과도 같았다. 철망을 두른 유리 밀실은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철망에 부착된 세 개의 원형 거울은 여러 각도에서 집과 관람자의 얼굴을 동시에 비춘다.


‘The Cross-Eyed Woman III’(2004). 메두사를 상징하는 여인의 초상은 헝겊에 석판화를 찍어 제작했다. 사팔뜨기 여인의 두 눈은 머리카락이 이루는 소용돌이를 따라 움직이는 듯하다. 소용돌이는 혼란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안과 밖이 공존하는 도상이자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36장의 헝겊 천으로 만든 책 ‘Ode A L'oubli’(2004)는 일종의 북아트로 볼 수 있다. 기억의 조각을 짜맞추는 데 퀼트만큼 적절한 표현 방식도 드물 것이다. 원래 책 형태이지만 각각의 형태를 더 잘 볼 수 있도록 책장을 분리해 한 장씩 전시했다. 앞·뒤표지는 전시에서 제외됐다.


82장의 드로잉을 모은 ‘He was reticent, But I have revealed him’. 2003년 작으로 주로 빗금이나 소용돌이 등 단순하게 반복되는 강박적 형태들로 구성됐다.


앞의 드로잉 연작 중 일부다. 부르주아의 작품에는 파편화된 신체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상징적인 파괴로 이어진다. 창살을 연상시키는 드로잉 아래로는 작가가 끼적인 문장들이 반쯤 지워진 상태로 남아 있다. 이는 내적 억압 속에서 침묵을 지켜야했던 과거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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