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2일부터 5월 13일까지 사간동 국제갤러리에서 루이즈 부르주아 근작전이 열린다. 2002년 전시 이후 근 3년 만에 열리는 그의 전시다. 조선일보 프리뷰에 함께 실린 작가의 최근 사진을 보니, 나이도 잊고 정열적으로 작업해온 그도 세월을 피해갈 수는 없구나 싶다. 하긴, 내가 기억하는 작가의 마지막 모습은 1982년 메이플소프가 찍은 사진이니, 벌써 23년 전(!) 일인 것이다. 그때도 이미 할머니였지만, 만 나이로도 벌써 아흔 넷이 된 지금은 그때보다 한결 조그마한 할머니의 모습이다. 물론 미소는 잃지 않았지만.
이번 전시의 출품작이 대부분 드로잉과 퀼트 위주로 일관한 것은 역시 기력이 쇠한 때문일까. 입체작품은 달랑 두 점뿐이니, 강렬한 인상을 주는 부르주아의 전작에 매력을 느꼈던 사람이라면 맥이 풀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작품 수도 많지 않아 1층에서 전시가 끝나버린다.
하지만 기력이 없어 붓을 놓고 가위를 들었던 만년의 마티스가 물감 대신 색종이 콜라주 작품으로 건재함을 과시했듯이, 부르주아의 최근작 속에서도 예상치 못한 수확을 얻을 수 있다. 퀼트로 만든 책 ‘Ode À L’Oubli’(2004)가 그 대표적인 예다. ‘Ode À L’Oubli’(2004)
36장의 헝겊에 수를 놓거나 천 조각을 바느질해 각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 이 작품은, 낱장으로 해체되어 전시 중이다. 명색이 책이니 넘기면서 한 장씩 감상해야 옳지만, 국제갤러리 측에서는 작품 훼손을 우려해 결국 액자에 넣어 전시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헝겊 책 낱장의 뒷면에 새겨진 바느질 자국까지도 작품의 일부인데, 뒷면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부르주아의 후기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봉제인형의 몸에 고스란히 남겨진 봉합의 흔적이 상처와 치유를 상징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아쉬움은 한층 커진다.
82장의 드로잉으로 구성된 ‘Il tait Réticent, Mais je Lai Révélé’(2003)
반면 이번 전시에서 가장 많은 수가 출품된 드로잉의 경우, 작품의 '아우라'라는 측면에서 볼 때 힘이 딸려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부르주아는 드로잉 작업을 하면서 변별력을 염두에 두기보다, 개인적인 카타르시스의 과정에 더 큰 매력을 느낀 것 같다. 창작을 통해 자신의 황량한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구체화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세계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작가인 만큼, 그의 드로잉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행위이기보다는 부단한 고행의 흔적이라고 봐야 옳다. 부르주아의 드로잉은 사람들이 불안할 때 무의식적으로 연습장 위에 끄적이는 흔적들과 닮았다. 강박적으로 보일 만큼 무수히 겹쳐지는 격자선, 같은 도형의 반복, 혼란스러운 소용돌이 그림, 글을 쓰고 의도적으로 지우는 행위...마치 감옥의 창살처럼 겹쳐지는 그 흔적은 우리가 간혹 (혹은 매일) 느끼는 불안과 증오, 두려움의 다른 얼굴이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평안을 줄 수 있다면, 변별력 따위가 무슨 상관인가. 종이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선을 긋고 그어서 악몽 같은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다면.
이번 전시의 출품작이 대부분 드로잉과 퀼트 위주로 일관한 것은 역시 기력이 쇠한 때문일까. 입체작품은 달랑 두 점뿐이니, 강렬한 인상을 주는 부르주아의 전작에 매력을 느꼈던 사람이라면 맥이 풀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작품 수도 많지 않아 1층에서 전시가 끝나버린다.
하지만 기력이 없어 붓을 놓고 가위를 들었던 만년의 마티스가 물감 대신 색종이 콜라주 작품으로 건재함을 과시했듯이, 부르주아의 최근작 속에서도 예상치 못한 수확을 얻을 수 있다. 퀼트로 만든 책 ‘Ode À L’Oubli’(2004)가 그 대표적인 예다. ‘Ode À L’Oubli’(2004)
36장의 헝겊에 수를 놓거나 천 조각을 바느질해 각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 이 작품은, 낱장으로 해체되어 전시 중이다. 명색이 책이니 넘기면서 한 장씩 감상해야 옳지만, 국제갤러리 측에서는 작품 훼손을 우려해 결국 액자에 넣어 전시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헝겊 책 낱장의 뒷면에 새겨진 바느질 자국까지도 작품의 일부인데, 뒷면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부르주아의 후기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봉제인형의 몸에 고스란히 남겨진 봉합의 흔적이 상처와 치유를 상징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아쉬움은 한층 커진다.
82장의 드로잉으로 구성된 ‘Il tait Réticent, Mais je Lai Révélé’(2003)
반면 이번 전시에서 가장 많은 수가 출품된 드로잉의 경우, 작품의 '아우라'라는 측면에서 볼 때 힘이 딸려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부르주아는 드로잉 작업을 하면서 변별력을 염두에 두기보다, 개인적인 카타르시스의 과정에 더 큰 매력을 느낀 것 같다. 창작을 통해 자신의 황량한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구체화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세계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작가인 만큼, 그의 드로잉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행위이기보다는 부단한 고행의 흔적이라고 봐야 옳다. 부르주아의 드로잉은 사람들이 불안할 때 무의식적으로 연습장 위에 끄적이는 흔적들과 닮았다. 강박적으로 보일 만큼 무수히 겹쳐지는 격자선, 같은 도형의 반복, 혼란스러운 소용돌이 그림, 글을 쓰고 의도적으로 지우는 행위...마치 감옥의 창살처럼 겹쳐지는 그 흔적은 우리가 간혹 (혹은 매일) 느끼는 불안과 증오, 두려움의 다른 얼굴이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평안을 줄 수 있다면, 변별력 따위가 무슨 상관인가. 종이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선을 긋고 그어서 악몽 같은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마음의 평정을 되찾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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